증평읍(曾坪邑) 증평읍(曾坪邑)은 대한민국 충청북도 증평군의 서부를 흐르는 미호강의 지류 보강천 좌안에 위치한 증평군의 군청 소재지이다. 읍의 중심으로 보강천이 흐르며 미호평야가 이어진다. 부근의 음성 지방에서 나는 담배와 기타 농산물을 집산하는 시장으로 발전되었다. 최근에는 인삼이 주로 재배된다. 194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36번 국도가 지난다. 증평군의 명소로 수로가교(水路架橋)가 있는데, 이는 금강 상류 유역에 펼쳐진 평야의 젖줄기가 되고 있으며, 몽리면적이 500만 평에 달한다. 고구려 시대 : 금물노군에 속함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 흑양군 청연현이라 칭함 고려 태조 23년(940년) : 청당현이라 칭함 고려 현종 9년(1018년) : 청주목 청안현이라 칭함 조선 태종 5년(1405년) : 청안현에서 근서면, 남면으로 분리되어 속함 조선 고종 32년(1895년) : 청안군 근서면, 남면에 속함 1914년 4월 1일 :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청안군에서 괴산군에 속함, 괴산군 증평면이 됨 1949년 8월 13일 : 증평읍으로 승격 1990년 12월 31일 : 충청북도 증평출장소가 설치되어 증평읍, 도안면을 관할 2002년 4월 8일 :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안 발의 2003년 5월 29일 :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 공포 2003년 8월 30일 : 증평군 증평읍 개청 법정리 행정리 교동리 교동1리, 교동2리 남차리 남차1리, 남차2리, 남차3리 남하리 남하1리, 남하2리, 남하3리, 남하4리 내성리 내성1리, 내성2리 대동리 대동리 덕상리 덕상1리, 덕상2리, 덕상3리 미암리 미암1리, 미암2리, 미암3리, 미암4리, 미암5리 사곡리 사곡1리, 사곡2리, 사곡3리 송산리 송산1리, 송산2리, 송산3리, 송산4리, 송산5리, 송산6리, 송산7리 신동리 신동1리, 신동2리, 신동3리, 신동4리, 신동5리 연탄리 연탄1리, 연탄2리, 연탄3리, 연탄4리 용강리 용강1리, 용강2리, 용강3리, 용강4리, 용강5리 율리 율1리, 율2리 장동리 장동1리, 장동2리, 장동3리, 장동4리, 장동5리, 장동6리, 장동7리 죽리 죽리, 원평리 중동리 중동1리, 중동2리 증천리 증천1리, 증천2리, 증천3리, 증천4리, 증천5리 증평리 증평1리, 증평2리, 증평3리 창동리 창동1리, 창동2리, 창동3리, 창동4리, 창동5리, 창동6리 초중리 초중1리, 초중2리, 초중3리, 초중4리, 초중5리, 초중6리, 초중7리, 초중8리, 초중9리 사적 제527호 증평 추성산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5호 증평 광덕사 석조여래입상 제141호 증평 남하리사지 삼층석탑 제197호 증평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군 제198호 증평 미암리 석조관음보살입상 제208호 증평 남하리 석조보살입상 충청북도 기념물 제98호 증평 배극렴 묘소 제122호 증평 연병호 생가 제132호 증평 신경행 묘소 제143호 증평 사곡리 우물 제160호 증평 김득신 묘소 제167호 증평 남하리 사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36호 증평 율리 석조관음보살입상 주요 시설 교육 한국교통대학교 증평캠퍼스 주거 아파트 송산리 지평건설 증평 송산 지평더웰 : 2014년 12월 입주.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의 폐합이 이루어질 때 청안군에 소속됐던 전체가 괴산군으로 합쳐지게 되자 청안군 남면의 26개리와 청안군 북면의 2개리, 청안군 읍내면의 회룡리, 청주군 산외2면의 초중리, 금대리의 일부와 월경, 청유 2개리를 병합하여 증천(曾川)과 장평(莊坪)의 두 이름에서 하나씩의 글자를 떼어 붙여 증평면이라 이름하여 괴산군 증평면이 됐다. 1949년 8월 13일: 증평면이 인구 증가로 증평읍으로 승격되었다. 1966년 1월 1일: 증평리에서 교동리·중동리·대동리를 나누어 법정리로 함에 따라 당초 11개리에서 3개리가 늘어나 14개리로 구성됐다. 1973년 7월 1일: 청원군 북이면 초중리를 증평읍에 편입하여 법정리가 15개리로 됐다. 1990년 12월 31일: 괴산군 증평읍, 도안면을 관할로 충청북도 증평출장소가 설치되었다.[2] 2002년 1월 2일: 증평리의 인구증가로 신동리·창동리·내성리·장동리·증천리를 법정리로 분리함에 따라 20개의 법정리를 관할하게 됐다. 2003년 8월 30일: 증평출장소가 증평군으로 승격하여 괴산군에서 분리되었다.[3] (1읍 1면) 증평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9)“장평”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裝坪”으로, 『朝鮮全道部窘面里洞名稱一覽』(1917)에는 “裝坪” 으로 나타난다.10) 증평군 내에 있는 지명을 조사하기 위해 마을별로 많은 분들의 협조를 받았다. 이 글은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뜻을 전한다. 11)『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보이는 “안합리”(安合理)는 『구한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안곡리(安谷里)”에 대한 오기(誤記)로 보인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의 기록에는 청안현 근서면에 29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증평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삼성리(三省里)ㆍ내동상리(內洞上里)ㆍ내동하리(內洞下里)ㆍ평사리(平沙里)ㆍ증자천리(曾子川里) 등 5개리이다. 그 뒤 증평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근서면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근서면은 26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내동상리와 내동하리는 내상리(內上里)로 합쳐졌으며, 증자천리는 증천리(曾川里)로 바뀌었고, 장평리(莊坪里)와 안곡리(安谷里)가 새로 생겼다.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증평리는 근서면의 장평리(壯坪里)ㆍ삼성리(三省里)ㆍ안합리(安合里)ㆍ내상리(內上里)ㆍ평사리(平沙里)ㆍ증천리(曾川里) 일부와 남면의 금반리(金盤里)ㆍ둔덕리(屯德里) 일부와 청주군(淸州郡) 산외이면(山外二面)의 초중리(楚中里)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증천리(曾川里)와 장평리(壯坪里)의 이름을 따서 증평리(曾坪里)라 하고, 괴산군(槐山郡) 증평면(曾坪面)에 편입하였다. 증평리는 당시 증평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1949년 8월 13일에 대통령령 제156호에 의하여 증평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괴산군 증평읍(曾坪邑) 증평리가 되었다. 증평리는 1966년 1월 1일에 교동리(校洞里)ㆍ중동리(中洞里)ㆍ대동리(大洞里)로 분리되었고, 다시 2002년 1월 2일에 창동리(昌洞里)ㆍ장동리(莊洞里)ㆍ증천리(曾川里)ㆍ내성리(內省里)ㆍ신동리(新洞里)로 분리되었다. 이때 대동(大洞) 5개리 중 2ㆍ3ㆍ4리를 증평리로 하였다.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증평리는 증천지소(曾川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증평리가 되었다. [ 유래 ] 증평리(曾坪里)는 1914년에 증천리(曾川里)와 장평리(壯坪里)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증평리에는 증평초등학교ㆍ단군전ㆍ삼일공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2010년 5월 현재 794세대에 2,055명이 거주하고 있다. 증평리의 어원이 된 증천리(曾川里)와 장평리(莊坪里, 壯坪里)에 대해서는 해당 법정마을 설명을 참고하기 바란다. 증평1리(曾坪一里) : 증평1리는 증평리 중 서쪽에 있으며, 동진아파트와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증평2리(曾坪二里) : 증평2리는 증평리 중 동쪽에 있으며, 그린빌라ㆍ제일맨션ㆍ성호빌라ㆍ경일주택ㆍ대원빌라ㆍ미혁빌라와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모두 318세대이며, ‘삼일공원’이 있다.빨간산(-山) : 현재 ‘증평장로교회’ 부근에 있던 나지막한 언덕이다. ‘빨간산’은 ‘빨간’과 ‘산’으로 나뉘며, ‘빨갛게 보이는 산’을 뜻한다. 빨갛게 보이는 이유는 흙 색깔 때문일 수도 있고, 나무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곳은 ‘성호빌라’ 뒤편으로, 실제로 흙이 빨갛다. 증평3리(曾坪三里) : 증평3리는 증평리 중 남쪽에 있으며, 대동연립과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 문화재 ] 단군전(檀君殿) : 증평1리에 있는, 국조 단군을 모시는 사당(祠堂)이다. 단군전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과 경천숭조사상(敬天崇祖思想)을 길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건립되었다. 1929년에 일제는 이곳에 일본 신사(神祠)를 세웠으나, 1945년 8월 16일 광복 이튿날에 청년들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1948년 5월 27일에 김기석(金基錫: 1897~1978) 씨 등 증평 지역의 유지들이 그 자리에 단군전을 건립하였다. 단군전은 정면 3칸ㆍ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본전과 담장을 세워 건립되었다. 편액은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1924~1984)이 썼다. 단군의 영정은 가로 0.42mㆍ세로 0.82m의 크기로, 평정건(平頂巾)에 흰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제향과 관리를 위해 1953년에 ‘단군전봉찬회(檀君殿奉讚會)’를 설립해 해마다 10월 3일 개천절과 음력 3월 15일 어천절(御天節: 단군이 승천한 날)에 제향하고 있다. 단군기원은 단군조선을 개국한 왕검(王儉)의 즉위년을 기원으로 한 연호(年號)로, 현재 쓰고 있는 단기의 기원은 『동국통감(東國通鑑)』(성종 15년, 1484)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즉 중국 요(堯) 임금 25년(무진년, B.C. 2333) 10월 3일에 단군이 태백산[백두산]에서 단군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군전은 2004년 4월 30일에 증평군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교동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증평리는 1966년 1월 1일에 교동리(校洞里)ㆍ중동리(中洞里)ㆍ대동리(大洞里)로 분리되었고, 다시 2002년 1월 2일에 창동리(昌洞里)ㆍ장동리(莊洞里)ㆍ증천리(曾川里)ㆍ내성리(內省里)ㆍ신동리(新洞里)로 분리되었다. 이때 대동(大洞) 5개리 중 2ㆍ3ㆍ4리를 증평리로 하였다.이처럼 교동리는 1966년 1월 1일에 증평리에서 분리되어 법정리가 되었다.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충청북도증평출장소가 설치될 때에는 장평지소 관할이었다. 그러다가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교동리가 되었다. [ 유래 ] 교동리라는 이름은 보통 조선시대 향교가 있었던 마을에 붙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 마을은 1966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이와는 거리가 멀다. 이곳에는 1930년 4월 19에 증평공립보통학교[지금의 증평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그로 인해 붙은 지명이다. 증평초등학교는 현재 증평리에 속해 있다. 교동리는 장동리ㆍ대동리ㆍ중동리ㆍ창동리에 들러 싸여 있다. 중동리와 함께 증평읍의 중심지다. 현재 교동리에는 괴산경찰서증평지구대ㆍ농협중앙회증평군지부ㆍKT증평지점ㆍ증평시외버스터미널 등이 들어서 있다. 2010년 5월 현재 420세대에 903명이 거주하고 있다. 교동1리(校洞一里) : 교동리 중 서북쪽에 있으며, 중앙연립과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물탕곳(-湯-)/물탱크(-tank) : 현재 증평소방서 옆에 있는 자리이다. ‘물탕곳’은 ‘물탕’과 ‘곳’으로 나뉜다. ‘물탕’은 ‘물을 채워 놓은 곳’이다. 따라서 ‘물탕’이나 ‘물탕곳’은 같은 뜻이다. 달리 ‘물탱크’로도 불리는데, 그 뜻은 ‘물탕’이나 ‘물탕곳’과 같다. 이곳은 예전에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이 있던 곳이다. 교동2리(校洞二里) : 교동리 중 동남쪽에 있으며, 주로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청안나들이(淸安-) : 현재 증평군청 앞 ‘사거리’에서 괴산군 청안면 방면으로 가는 증천리까지를 말한다. ‘청안나들이’는 ‘청안’과 ‘나들이’로, ‘나들이’는 다시 ‘나들’과 접미사 ‘이’로 나뉜다. ‘나들’은 ‘나고 들다’의 어간이니, ‘나들이’는 ‘특정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길목’이란 뜻이다. 따라서 ‘청안나들이’는 ‘괴산군 청안면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길목’으로 풀이된다. 중동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증평리는 1966년 1월 1일에 교동리(校洞里)ㆍ중동리(中洞里)ㆍ대동리(大洞里)로 분리되었고, 다시 2002년 1월 2일에 창동리(昌洞里)ㆍ장동리(莊洞里)ㆍ증천리(曾川里)ㆍ내성리(內省里)ㆍ신동리(新洞里)로 분리되었다. 이때 대동(大洞) 5개리 중 2ㆍ3ㆍ4리를 증평리로 하였다.이처럼 중동리는 1966년 1월 1일에 증평리에서 분리되어 법정리가 되었다.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충청북도증평출장소가 설치될 때에는 장평지소 관할이었다. 그러다가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중동리가 되었다. [ 유래 ] 중동리는 교동리ㆍ창동리ㆍ대동리로 둘러싸인 마을로, 증평읍의 가운데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현 증평군청 자리에는 과거 증평역이 있어 그 주변은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또한 오래 전부터 5일장이 개설되고, ‘장뜰재래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도 증평새마을금고ㆍ증평신용협동조합ㆍ신한은행 증평지점ㆍ괴산축협 증평지소 등의 금융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증평역은 1980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2010년 5월 현재 285세대에 623명이 거주하고 있다. 중동1리(中洞一里) : 중동리 중 서쪽에 있으며,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중동2리(中洞二里) : 중동리 중 동쪽에 있으며, 선경아파트와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증평장이 서는 곳이다. 곡마당(曲馬堂) : 예전 ‘싸전마당’ 일대로, 곡마단(曲馬團)이 공연하던 곳이다. ‘곡마당’은 ‘곡마’와 ‘당’으로 나뉜다. ‘곡마(曲馬)’는 ‘길들여 놓은 말을 타고 재주를 부리거나 또는 그 재주’를 말하는데, 달리 ‘말놀음’이라고도 한다. ‘당’은 ‘마당’이다. 따라서 ‘곡마당’은 ‘곡마와 기술, 요술 따위를 보이는 마당’으로 풀이된다.나무전거리(-廛-) : 현재 ‘일신약국’ 주변이다. 과거 땔나무를 파는 가게가 많았다. ‘나무전거리’는 ‘나무전’과 ‘거리’로, ‘나무전’은 다시 ‘나무’와 ‘전’으로 나뉜다. ‘전’은 ‘물건을 벌여놓고 파는 가게’이다. 따라서 ‘나무전거리’는 ‘나무를 벌여놓고 파는 가게가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 네거리 : 예전 증평역[현재 증평군청] 앞 사거리 일대를 말한다. ‘네거리’는 ‘네 갈래로 나뉜 거리’를 뜻한다. 소전마당(-廛) : 예전 ‘싸전마당’ 부근으로, 우시장이 있었다. ‘소전마당’은 ‘소전’과 ‘마당’으로 나뉜다. 따라서 ‘소전마당’은 ‘소를 벌여놓고 파는 마당’으로 풀이된다.시장통(市場-) : 지금 5일장이 서는 ‘장뜰재래시장’ 구간을 말한다. ‘시장통’은 ‘시장’과 ‘통’으로 나뉜다. ‘통’은 ‘거리’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다. 따라서 ‘시장통’은 ‘시장거리’로 풀이된다. 싸전마당(-廛-) : ‘장뜰재래시장’ 내 야외광장 주변을 말한다. 예전 쌀가게가 많았고 넓은 마당이 있었다. ‘싸전마당’은 ‘싸전’과 ‘마당’으로 나뉘고, ‘싸전’은 ‘쌀전’에서 ‘ㄹ’이 탈락한 어형이다. 따라서 ‘싸전마당’은 ‘쌀을 벌려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는 마당’으로 풀이된다.어물전거리(魚物廛-) : 현재 ‘산초건강원’ 골목으로, 과거 어물가게가 있었다. 1940년대 말 일본인이 운영하던 ??영단방앗간??에 화재가 나서 1주일간 탔다. 당시는 소방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은 관계로 불을 낸 김 아무개 씨의 모친은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화재가 났던 자리에 어물전이 생겨났다. ??어물전거리??는 ??어물전??과 ??거리??로 나뉘고, ??어물전??은 다시??어물??과 ??전??으로 나뉜다. ??어물??은 ??생선이나 말린 생선을 벌려놓고 파는 가게 들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유기전거리(鍮器廛-) : 현재 ‘괴산축협증평지소’ 골목으로, 과거 놋그릇 가게가 있었다. ‘유기전거리’는 ‘유기전’과 ‘거리’로 나뉘고, ‘유기전’은 다시 ‘유기’와 ‘전’으로 나뉜다. ‘유기’는 ‘놋그릇’을 말한다. 따라서 ‘유기전거리’는 ‘놋그릇을 벌려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증평장(曾坪場) : 중동리에 5일마다 서는 전통적인 재래시장이다. 증평 5일장은 1일과 6일에 5일마다 서는 정기시장이다. 1923년 5월 1일에 조치원역∼증평역[당시 청안역, 지금의 증평군청 자리] 간 충북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인근 지역의 주요 농산물이 서울ㆍ부산 등 대도시로 운송됨에 따라 증평역 주변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5일장이 발달했다. 1928년 증평[청안] ~충주 간 충북선이 연장 개통됨으로 증평장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지금의 장소에 장이 서기 전인 1970년대 중반까지는 중동리 61번지[옛 ‘동일약국’ 자리]~중동리 112번지[‘반도천막’ 자리] 구간에 5일장이 열렸다. 2004년에 증평군에서는 재래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비 가림 시설을 설치하여 상인과 구매자에게 편리를 제공하고 있다. 채소전거리(菜蔬廛-) : 현재 ‘태평파크’ 옆 골목으로, 과거 채소가게가 있었다. ‘채소전거리’는 ‘채소전’과 ‘거리’로 나뉘고, ‘채소전’은 다시 ‘채소’와 ‘전’으로 나뉜다. 따라서 ‘채소전거리’는 ‘채소를 벌려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포목전거리(布木廛-) : 현재 ‘충북장’ 골목으로, 지금도 포목가게 일부가 남아 있다. ‘포목전거리’는 ‘포목전’과 ‘거리’로 나뉘고, ‘포목전’은 다시 ‘포목’과 ‘전’으로 나뉜다. ‘포목’은 ‘베와 무명’을 말한다. 따라서 ‘포목전거리’는 ‘베와 무명을 벌려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 피전거리(-廛-) : 현재 ‘화선집’이 있는 골목으로, 과거 고기를 팔았다. ‘피전거리’는 ‘피전’과 ‘거리’로 나뉘고, ‘피전’은 다시 ‘피’와 ‘전’으로 나뉜다. 여기서 ‘피’는 ‘고기와 선지’를 아울러 가리킨다. 따라서 ‘피전거리’는 ‘고기와 선지를 벌려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 [ 문화재 ] 대장장이 최용진 : 최용진 씨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고유 농기구와 생활도구 등을 제작하여 선조들의 농경문화를 널리 전수하고 있는 분이다. 최용진 씨는 현재 증평읍 중동 85-17번지 선경아파트 뒤편에서 10평 남짓의 ‘증평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다. 최 씨는 1995년 11월에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주관한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참가해 전국 최초로 야장부문(冶匠部門) 고유기능 전승자로 선정되었다. 또한 증평출장소 및 증평군향토문화연구소 등 관련 단체에서는 대장장이 최용진 씨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추진하였고, 2005년에 증평군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대동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증평리는 1966년 1월 1일에 교동리(校洞里)ㆍ중동리(中洞里)ㆍ대동리(大洞里)로 분리되었고, 다시 2002년 1월 2일에 창동리(昌洞里)ㆍ장동리(莊洞里)ㆍ증천리(曾川里)ㆍ내성리(內省里)ㆍ신동리(新洞里)로 분리되었다. 이때 대동(大洞) 5개리 중 2ㆍ3ㆍ4리를 증평리로 하였다.이처럼 대동리는 1966년 1월 1일에 증평리에서 분리되어 법정리가 되었다.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충청북도증평출장소가 설치될 때에는 장평지소 관할이었다. 2002년 1월 2일 행정구역 조정 시 대동1리만 대동리에 남고 대동2ㆍ3ㆍ4리는 증평리에 속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대동리가 되었다. [ 유래 ] 대동리는 중동리ㆍ교동리ㆍ증평리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다. 대동리라는 이름은 증평리에서 분리될 때 가장 큰 마을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그 후 대동 2ㆍ3ㆍ4리는 증평리에 남고 대동1리만 법정리로 남게 되어 현재는 증평읍에서 가장 작은 마을이 되었다. 인구수도 율리를 제외하고는 가장 적다. 이 때문인지 주택지만 있을 뿐 관공서 등 특징적인 기관과 건물이 없다. 2010년 5월 현재 128세대에 280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동리 : 대동리는 단일 마을로,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용강리(龍江里)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근서면에 29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용강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외룡리(外龍里)ㆍ석현리(石峴里)ㆍ곡강리(曲江里)ㆍ청룡리(靑龍里)ㆍ내룡리(內龍里)ㆍ증자천리(曾子川里) 등 6개리가 있었다. 그 뒤 용강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근서면(近西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근서면은 26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증자천리(曾子川里)가 증천리(曾川里)로 변경되었으며, 청룡리(靑龍里)가 없어졌다.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용강리는 근서면 외룡리(外龍里)ㆍ석현리(石峴里)ㆍ곡강리(曲江里)ㆍ내룡리(內龍里)ㆍ증천리(曾川里) 일부와 남면(南面)의 작동(鵲洞)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용문리와 곡강리의 이름을 따서 용강리라 하고, 괴산군 증평면에 편입하였다.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용강리는 증천지소(曾川支所) 관할이었다. 2002년 1월 2일에 주민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지소의 관할구역을 변경할 때, 용강리는 증천지소에서 장평지소(莊坪支所)로 바뀌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용강리가 되었다. [ 유래 ] 용강리는 1914년에 용문리와 곡강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용강리는 증평읍사무소에서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충주대증평캠퍼스[옛 청주과학대학]가 있고, 코스모텍ㆍ두산 등의 기업체가 들어와 있다. 2010년 5월 현재 434세대에 833명이 거주하고 있다. 용강1리(龍江一里) : ㆍ안용문이/내용문이(內龍門-)/내룡리(內龍里) : 용강1리와 용강3리는 통틀어 ‘용문(龍門)’ 또는 ‘용문이(龍門-)’로 불린다. 이는 지형이 ‘용이 드나드는 문’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용문’은 ‘청룡재’를 기준으로, ‘바깥용문이’와 ‘안용문이’로 나뉜다. 용강1리는 ‘청룡재’ 안쪽[북쪽]에 있어 ‘안용문이’ㆍ‘내용문이(內龍門-)’ㆍ‘내룡리(內龍里)’로 불린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내룡리(內龍里)’으로 불리던 곳이다. ‘안용문이’는 ‘웃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는데. ‘웃마을’은 마을의 은행나무가 있는 곳을 말하고 ‘아랫마을’은 사곡2리 ‘사청’ 쪽에 있는 곳을 말한다.소두방재/솥두방재 : ‘안용문이’ 뒤[동쪽]에 있는 산이다. ‘소두방재’ㆍ‘솥두방재’는 ‘소두방’ㆍ‘솥두방’과 ‘재’로 나뉜다. ‘소두방’ㆍ‘솥두방’은 모두 ‘솥뚜껑’을 뜻하는 ‘소댕’의 방언형으로, ‘소두방재’ㆍ‘솥두방재’는 ‘소댕 모양으로 생긴 고개’로 풀이된다.용강들(龍江-) : ‘안용문이’ 앞[서쪽]에 있는 들이다. ‘용강들’은 ‘용강’과 ‘들’로 나뉘며, ‘용강리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용강소류지(龍江小溜池) : ‘안용문이’ 서쪽에 있던 못으로, 1945년에 축조되었다. 경지정리로 인해 없어졌다. ‘용강소류지’는 ‘용강’과 ‘소류지’로 나뉘며, ‘용강리에 있는 못’으로 풀이된다.청룡재(靑龍-)/청룡재고개(靑龍-) : ‘청룡재’는 ‘청룡’과 ‘재’로 나뉜다. 지명에 나타나는 ‘청룡’은 주로 ‘주산(主山)에서 뻗어나간 왼쪽 산줄기’를 가리킨다. 풍수지리상으로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청룡재고개’는 ‘재’가 ‘고개’의 의미인 줄 모르고, 같은 뜻의 ‘고개’를 덧붙인, 일종의 유의중복 어형이다. 이 고개를 경계로 안쪽[북쪽]을 ‘안용문이’로, 바깥쪽[남쪽]을 ‘바깥용문이’로 부른다. 현재는 포장농로가 되었다. 함석산[-石山] : ‘안용문이’ 동쪽에 있는 산으로, 암용의 머리에 해당되는 곳이다. 과거 샘이 있었고 돌이 많다. ‘함석산’은 ‘한석산’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한석산’은 ‘한’과 ‘석산’으로, ‘석산’은 다시 ‘석’과 ‘산’으로 나뉜다. 따라서 ‘한석산’이나 변화형 ‘함석산’은 ‘큰 돌산’으로 풀이된다. 용강2리(龍江二里) : ㆍ곡강(曲江)/곡강골(曲江-) : ‘돌고개’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증평에서 괴산군 청안면 방면의 592번지방도 오른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곡강(曲江)’으로 불리던 곳이다. ‘곡강’이나 ‘곡강골’은 마을 형태가 굽이쳐 흐르는 강[河回]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전설에 따르면, 용강리에는 암용과 수용이 있었는데 암용은 ‘안용문이’에 수용은 ‘바깥용문이’에 살았다. 용강리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이곳에 살던 용이 승천할 때 꼬리를 쳐서 강이 구부러졌다고 한다. 김득신(金得臣)은 ‘차운(次韻)’이란 제목으로 ‘곡강’을 노래하고 있다. 용강3리(龍江三里) :ㆍ바깥용문이/외용문이(外龍門-)/외룡리(外龍里) : ‘용문’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다. ‘용문’은 ‘청룡재’를 기준으로 ‘바깥용문이’와 ‘안용문이’로 나뉜다. 용강3리는 ‘청룡재’ 바깥쪽[남쪽]에 있어 ‘바깥용문이’ㆍ‘외용문이(外龍門-)’ㆍ‘외룡리(外龍里)’로 불린다. 수용이 살던 곳이라 전한다. ‘(주)유니더스’가 수용의 머리가 있는 곳이고, ‘(주)코스모텍’ 자리가 용의 꼬리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호구총수』(정조 13년, 1789)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외룡리(外龍里)’로 불리던 곳이다.빨각산(-山) : ‘바깥용문이’ 동쪽, ‘절골’ 안에 있는 산이다. ‘(주)유니더스’ 근처이다. ‘빨각산’는 ‘빨간산’의 변화형이다. ‘빨간산’은 ‘흙이 빨간 산’으로 풀이된다. 이 산은 실제로 빨간 흙으로 되어 있다.상종말[山旌-] : ‘바깥용문이’ 입구, ‘곡산연씨열녀각’이 있는 곳을 말한다. ‘상종말’은 ‘상정말’의 변화형으로 보인다. ‘상정말’은 다시 ‘산정말’에 기원을 둔다. ‘산정말’은 ‘산정’과 ‘말’로 나뉜다. ‘산정’은 몇 가지로 풀이된다. 하나는 ‘산정(山亭)’으로, 다른 하나는 ‘산정(山井)’으로, 마지막 하나는 ‘산정(山旌)’으로 볼 수 있다. 본 예는 열녀각이 있는 곳이니, 마지막으로 보아 ‘산 정려문이 있는 마을’로 풀이된다. 옻샘 : ‘절골’ 안에 있던 샘이다. ‘옻샘’은 ‘옻’과 ‘샘’으로 나뉜다. ‘옻’은 ‘옻나뭇과 식물 속에 있는 우루시올(urushiol)에 의한 접촉성 피부염’으로, 빨갛게 붓거나 물집이 생기거나 하여 매우 가렵다. 옻이 오르면 찬물로 닦는 것이 효과적이다. 찬물이 피부염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옻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는 찬물 샘을 ‘옻샘’으로 불렀던 것이다. 과거 물이 차고 좋아 피부병에 특별한 효험이 있었다. 농로가 나면서 사라졌다.장등 : ‘바깥용문이’ 동쪽에 있던 마을의 높은 언덕이다. 예전에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으나, 현재는 도로가 나 있다. ‘장등’은 ‘산마루’의 방언형이다.절골 : ‘바깥용문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괴산군 청안면 금신리 ‘회룡’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텃논들’ 동쪽에 붙어 있다. ‘절골’은 ‘절’과 ‘골’로 나뉘며, ‘절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텃논들 : ‘바깥용문이’ 동쪽에 있는 들이다. ‘텃논들’은 ‘텃논’과 ‘들’로 나뉜다. ‘텃논’은 ‘집터에 딸리거나 마을 가까이에 있는 논’을 뜻하니, ‘텃논들’은 ‘집터에 딸리거나 마을 가까이에 있는 논으로 되어 있는 들’로 풀이된다. 용강4리(龍江四里) : ㆍ돌고개1/석현(石峴) : 마을 서쪽에 있는 ‘돌고개2’[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달리 ‘석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돌고개’에 대한 한자 이름이다. 『호구총수』(정조 13년, 1789년)에는 보이지 않으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석현(石峴)’으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石峴里/돌고?’로 기록되어 있다. 광산앞들(鑛山-) : ‘돌고개1’[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광산앞들’은 ‘광산’과 ‘앞들’로 나뉘며, ‘광산 앞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예전에 ‘돌고개2’[고개]에 금광이 있었고, 그 앞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돌고개2/금정간[金店間] : ‘돌고개1’[마을] 서쪽에 있는 고개이다. ‘돌고개2’[고개]는 ‘돌’과 ‘고개’로 나뉘며, ‘돌이 많은 고개’로 풀이된다. 이 고개로 인하여 마을 이름도 ‘돌고개1’[마을]이 되었다. 달리 ‘금정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금점간’의 연구개음화 어형이다. 최초의 어형 ‘금점간’은 ‘금점’과 ‘간’으로 나뉜다, ‘금점(金店)’은 ‘금광(金鑛)’과 같은 뜻이고, ‘간(間)’은 ‘대장간’ㆍ‘외양간’ㆍ‘푸줏간’ 등과 같이, 몇몇 명사 뒤에 붙어 ‘장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다. 따라서 ‘금정간’은 ‘금광이 있는 장소’로 풀이된다. 실제 이곳에서는 예전에 금을 캤다. 돌깨너머 : ‘돌고개1’[마을] 동쪽에 있는 고개로, 괴산군 청안면 금신리로 갈 때 넘었다. 고개에 돌이 많아 지게 길을 내느라고 돌을 깨며 넘어 다녔다는 말이 전한다. 그러나 ‘돌깨너머’는 ‘돌고개너머’의 변화형이다. ‘돌고개너머’는 ‘돌고개’와 ‘너머’로 나뉘며, ‘돌고개2[고개] 너머의 장소’로 풀이된다. 현재는 2차선 포장도로가 되었다.모종골[慕亭-] : ‘안까치골’ 북쪽에서 ‘안까치골’과 이어지는 골짜기이다. ‘모종골’은 ‘모정골’의 변화형이다. ‘모정골’은 ‘모정’과 ‘골’로 나뉘며, ‘모정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모정(慕亭)’은 ‘짚이나 새 따위로 지붕을 이은 정자’를 뜻한다. 농사를 짓는 경작지에서 쉼터 역할을 하는 곳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전에 모정이 있어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샘너머골 : ‘돌고개2’[고개]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샘너머골’은 ‘샘너머’와 ‘골’로 나뉘며, ‘샘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성내골(城內-)/성니골[城內-]/성리골[城內-] : ‘돌고개1’[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청안면으로 가는 길목이다. ‘성내골’은 ‘성내’와 ‘골’로, ‘성내’는 다시 ‘성’과 ‘내’로 나뉜다. ‘성’은 ‘성(城)’이고, ‘내’는 ‘안[內]’의 뜻이니, ‘성내골’은 ‘성 안쪽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골짜기가 마치 성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아늑해서 붙은 이름이다. ‘성니골’과 ‘성리골’은 모두 ‘성내골’의 변화형으로, 그 뜻은 같다.성리고개[城內-] : ‘성내골’에 있는 고개로, 청안면 금신1리(錦新一里)와 경계를 이룬다. 현재는 1차선 포장도로이나, 4차선 확장공사가 진행 중이다. ‘성리고개’는 ‘성리’와 ‘고개’로 나뉘며, ‘성리’는 ‘성내’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성리고개’는 ‘성내골에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여수박골 : ‘돌고개1’[마을] 북쪽, 충주대증평캠퍼스 기숙사 쪽으로 있는 골짜기이다. ‘여수박골’는 ‘여수박’과 ‘골’로 나뉘고, ‘여수박’은 다시 ‘여수’와 ‘박’으로 나뉜다. ‘여수’는 ‘여우[狐]’에 대한, ‘박’은 ‘바위’에 대한 방언형이다. ‘여수박’은 지역에 따라 ‘여우바위’ㆍ‘여시바위’ㆍ‘여수배’ 등으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에는 여우 모양을 닮았다거나 여우가 살았다는 유래담이 붙어 있다. 따라서 ‘여수박골’은 ‘여우 모양을 닮은 바위가 있거나 여우가 살았던 바위가 있는 골짜기’이다.코단고개 : ‘돌고개1’[마을] 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돌고개1’[마을]에서 괴산군 청안면 금신3리 ‘새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경사가 급해 지게를 짊어지고 가다보면 허리가 구부러지면서 코가 고개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는 근거 없는 설명이다. ‘코단고개’는 ‘곶안고개’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곶안고개’는 ‘곶안’과 ‘고개’로, ‘곶안’은 다시 ‘곶’과 ‘안’으로 나뉜다. ‘곶’은 원래 ‘바다나 호수로 뾰족하게 내민 땅[串ㆍ岬]’을 뜻한다. 그러나 이 ‘곶’이 지명에 사용될 경우, 원래 의미와의 관련 아래 ‘들판 쪽으로 산등성이가 쭉 뻗어 나온 곳’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곶안고개’나 변화형 ‘코단고개’는 ‘들판 쪽으로 산등성이가 쭉 뻗어 나온 곳 안쪽에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이 고개에는 서낭당도 있었으나, 현재는 이용되지 않는다. ‘곶’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용강2리 ‘꽃산구링이’를 참고하기 바란다. 용강5리(龍江五里) : ‘돌고개1’[마을] 서쪽, 충주대증평캠퍼스 후문 쪽에 있는 서호아파트단지이다. [ 문화재 ] 곡산연씨열녀각(谷山延氏烈女閣) : 용강3리 331번지에 있는 열녀각이다. 열녀각은 이 지역에 거주하던 장환일(張煥一: 옥구장씨)의 처 곡산연씨(谷山延氏)의 정려이다. 남편이 위독하자 연 씨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5일간이나 연명시켰으나, 남편은 끝내 세상을 떴다. 그러자 연 씨 또한 약을 먹고 남편을 따라 숨을 거뒀다. 고종 29년(1892)에 영인(令人)에 증직되고, 정려가 명해 졌다. 건물은 정면 1칸ㆍ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열녀각의 안에는 ‘증조봉대부동몽교관장환일처영인곡산연씨열녀지문(贈朝奉大夫童蒙敎官張煥一妻令人谷山延氏烈女之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비지정문화재이다.ㆍ장용기부부정효각(張龍基夫婦旌孝閣) : 용강3리 547-1에 있는 정효각이다. 정효각은 효자 장용기와 그의 처 능성구씨(綾城具氏)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이 부부는 어머니가 병이 들자 극진히 간호했고,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와 같은 효행을 기리고자 1926년에 유림과 문중에서 정효각을 세웠다. 사당의 건물 구조는 정면 1칸ㆍ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사당 안에는 ‘효자효부학생장공용기처유인능성구씨정효문(孝子孝婦學生長公龍基妻孺人綾城具氏旌孝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비지정문화재이다. 율리(栗里)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남면(南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남면에 27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율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삼기리(三岐里)ㆍ율치리(栗峙里)ㆍ봉천리(奉天里) 등 3개리가 있었다. 그 뒤 율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남면(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남면은 25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봉천리(奉天里)가 외봉천리(外奉天里)와 내봉천리(內奉天里)로 나뉘었다.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율리는 남면 삼기리(三岐里)ㆍ율치리(栗峙里)ㆍ외봉천리(外奉天里)ㆍ내봉천리(內奉天里)와 청주군 산외이면(山外二面)의 청유리(淸油里)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율치리와 삼기리의 이름을 따서 율리라 하고, 괴산군 증평면에 편입하였다.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율리는 증천지소(曾川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율리가 되었다. [ 유래 ] 율리는 1914년에 율치리와 삼기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율리는 증평읍의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최근 휴양촌과 산악자전거 코스가 조성되는 등 증평군의 대표적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2010년 5월 현재 112세대에 197명이 거주하고 있다. 율1리(栗一里) :ㆍ밤티/밤티골/율치((栗峙) : ‘밤고개2’[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밤티’나 ‘밤티골’은 모두 ‘밤고개’ 아래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율치’는 ‘밤티’를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율치리(栗峙里)’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栗峙/밤티’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80여 전에 김치(金緻, 임진왜란 때 순국한 진주목사 김시민의 양아들,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이룬 마을이다. 마을 뒤편에는 김치와 그의 아들 김득신, 손자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율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최근에는 휴양촌이 조성되어 있어 각종 연수와 행사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득신(金得臣)은 ‘율협도중(栗峽道中)’과 ‘율협(栗峽)’이란 제목으로 ‘밤티골’을 노래하고 있다. 율2리(栗二里) : ㆍ봉천리(奉天里) : ‘밤티’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 ‘봉천리(奉天里)’로 기록되어 있고,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내봉천(內奉天)’과 ‘외봉천(外奉天)’으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고유지명 없이 ‘內奉天’과 ‘外奉天’으로 기록되어 있다. 봉천리는 하음봉씨(河陰奉氏)들이 처음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기 시작해서 붙인 이름이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端宗)을 폐위시킨 세조 2년(1456)에, 성삼문?방팽년?유응부 등 사육신들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 이들이 거사에 실패하자 사옹원별좌(司饔院別座) 봉여해(奉汝諧)는 세조를 살해하기 위해 칼을 차고 어전(御殿)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도중에 의금부(義禁府)에 발각되어 죽게 되었다. 이후 봉여해의 친족들은 참화(慘禍)를 면하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 중 일부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봉 씨들이 앞산에 올라 고향인 강화도(江華島)를 쳐다보며 향수를 달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양에서 봉 씨들의 일족을 멸살하기 위해 찾아오는 관리들을 감시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봉천리는 ‘바깥봉천이[外奉天]’와 ‘안봉천이[內奉天]’로 나뉜다. 전자는 봉천리 중 바깥쪽에 있는 마을로, ‘머릿돌은혜원’이 있는 곳이다. 후자는 봉천리 중 안쪽에 있는 마을로, 괴산군 청안면 ‘질마재’로 넘어가는 곳에 있다. 구석산(-山) : ‘바깥봉천이’ 북서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460.8m이다. 괴산군 청안면 문방리(文芳里)와 경계를 이룬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청안현(淸安縣) 불우조(佛宇條)에는 “구석사재좌구산세전건읍초기리산지고취수족지신자이명구석유조회기(龜石寺在座龜山世傳建邑初忌離山之鼓取水族之腎者而名龜石有曹繪記)” 즉 “구석사는 좌구산에 있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이 고을을 세웠을 때 남쪽 산이 높은 것을 꺼려 이 절을 세우고 수족(水族)의 신인 거북의 이름을 따서 구석이라 했다는 조회(曺繪)의 기록이 있다.”라는 뜻이다. 이 기록대로라면 구석산은 ‘구석사’와 관련되며, ‘거북 모양의 돌이 있는 산’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구석산’은 ‘구석’과 ‘산’으로 나뉘며, ‘구석에 있는 산’으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망나지골 : ‘안봉천이’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망나지골’은 ‘망나지’와 ‘골’로 나뉜다. 여기서 ‘망나지’의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 ‘망나니’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망나니’는 ‘노래기’를 뜻하니, ‘망나지골’은 ‘노래기가 많은 골짜기’로 풀이된다.망월장등(望月-) : ‘안봉천이’ 뒤[북쪽]에 있는 산마루이다. ‘망월장등’은 ‘망월’과 ‘장등’으로 나뉘며, ‘달을 바라보는 산마루’로 풀이된다. ‘장등’은 ‘산마루’의 충청도방언형이다. 물치폭포(-瀑布) : ‘바깥봉천이’와 ‘안봉천이’ 사이에 있는 폭포이다. ‘물치폭포’는 물치와 폭포로 나뉜다. 여기서 ‘물치’는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 지역에 따라서는 ‘물이 내리치는’ 뜻과 관련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밤나무단지(-團地) : ‘안봉천이’ 남서쪽에 있다. ‘밤나무단지’는 ‘밤나무’와 ‘단지’로 나뉘며, ‘밤나무가 집단적으로 자라고 있는 곳’으로 풀이된다. 이곳은 예전에 밤나무가 많았지만, 지금은 벌목을 해서 그리 많지 않다. 봉천골(奉天-) : ‘밤티’에서 ‘바깥봉천이’로 가는 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봉천골’은 ‘봉천’과 ‘골’로 나뉘며, ‘봉천리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안골 : ‘바깥봉천이’에서 구석산 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안골’은 ‘안’과 ‘골’로 나뉘며, ‘안쪽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일라지골 : ‘안봉천이’ 동남쪽, ‘망나지골’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충남 공주시 의당면 덕학리 ‘일라동’[마을]은 달리 ‘이라울’로도 불린다. 그러나 ‘일라동’이나 ‘이라울’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본 예도 ‘일라지’와 ‘골’로 나뉘나, ‘일라지’의 뜻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할미당(-堂) : ‘물치폭포’ 위쪽, 산 정상에 있던 제단이다. ‘할미당’은 ‘서낭당’을 말한다. ‘서낭당’은 ‘서낭에게 제사하기 위한 제단’으로, 지방에 따라 성황당(城隍堂)ㆍ할미당(-堂: 전남)ㆍ천황당’(天隍堂: 경북)ㆍ국사당(國師堂: 평안)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과거 이곳에는 서낭에게 제사하는 제단이 있었다. ‘서낭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초중2리 ‘서낭골’을 참고하기 바란다. [ 문화재 ] 율리석조관음보살입상(栗里石造觀音菩薩立像) : 증평 시가지에서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 방면으로 503번지방도를 따라 가면 증평읍 율1리에 이른다. 이 불상은 율1리 앞의 들판에 있던 석조물인데, 1979년에 율리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수몰되자 지금의 위치인 저수지 서편 언덕으로 옮겨졌다. 당시 보살입상(菩薩立像) 밑에서 지석(誌石)이 출토되었는데, “대시주 서정민 서경술 석수 박노적 박성립 화주 한두성 숭정후 갑신년 10월 일 입(大施主徐丁民徐京戌石手朴老赤朴成立化主韓斗星崇禎後甲申年十月日立)”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이로 보아 보살입상은 숙종 30년(1704)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다듬어진 보살입상은 높이 2.10m로, 불신(佛身)은 육중하며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상호는 마멸이 심해 원형을 알 수 없고, 귀는 어깨에 닿았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위로 들어 가슴에 얹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이고, 왼손은 아래로 늘어뜨린 여원인(與願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활모양의 주름을 하고 있는데, 허리에 띠를 두른 듯하다. 2002년 3월15일에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이 보살입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마을의 한 노인이 미륵을 정성껏 모시다가 그만 귀찮아서 더 이상 모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노인의 머리에 부스럼이 많이 났다. 노인은 백방으로 처방해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에 미륵에게 다시 빌었더니 씻은 듯이 나았다. 또 미륵 옆에서 논일을 하던 농부가 새참을 먹고 있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논두렁이 무너져 내렸다. 이에 미륵에게 약간의 공양을 하였더니 더 이상 논두렁이 무너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농부는 무엇을 먹더라도 미륵에게 공양을 했다. 또 아들이 없어 고민하던 부녀자가 미륵에게 치성을 드리고 한 번에 삼형제를 출산했다. 미륵의 영험으로 간주해 “아들 하나만 데려가라.”며 기도를 올렸더니, 이번에는 삼형제를 한꺼번에 데리고 갔다. ㆍ율리3층석탑(栗里三層石塔) : 증평읍 송산리 253에 있다. 증평 시가지에서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 방면으로 503번지방도를 따라 가면 증평읍 율1리에 이른다. 여기서 동북쪽 계곡을 따라 약 2km 쯤 들어서면 구석산(龜石山)의 구석사(龜石寺) 터에 이른다. 이 터에 3층 석탑의 탑재가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민속체험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청안현(淸安縣) 불우조(佛宇條)에는 “구석사재좌구산세전건읍초기리산지고취수족지신자이명구석유조회기(龜石寺在座龜山世傳建邑初忌離山之鼓取水族之腎者而名龜石有曹繪記)” 즉 “구석사는 좌구산에 있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이 고을을 세웠을 때 남쪽 산이 높은 것을 꺼려 이 절을 세우고 수족(水族)의 신인 거북의 이름을 따서 구석이라 했다는 조회(曺繪)의 기록이 있다.”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는 사지(寺址)와 탑(塔)을 언급해, “구석산 국유림의 율리에 있으며, 전(田)으로 변해서 반 헐어서 깨진 석탑이 있다.”고 했다. 이 탑은 복원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높이는 1.6m이다. 기단(基壇)의 갑석(甲石)과 1층 탑신(塔身), 옥개석(屋蓋石), 2?3층 옥개석(屋蓋石)이 남아 있을 뿐이며 상륜부(上輪部)는 결실되었다. 기단갑석(基壇甲石)은 복련(伏蓮)의 연판(蓮瓣)을 조각하고 고임을 마련했으며, 너비 68cm?높이 16cm이다. 1층 탑신(塔身)은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으며 너비 40.5cm?높이 20.5cm이고, 옥개석(屋蓋石)은 3단 받침에 고임을 마련했으며 너비 80cm?높이 30.2cm이다. 2층 옥개석은 3단의 받침에 고임을 마련했으며 너비 67cm?높이 28.3cm이다. 3층 옥개석은 3단의 받침에 고임을 마련했으며 너비 51cm?높이 17cm이다. 이 탑은 옥개석(屋蓋石)의 전각(轉角)이 파손됐으나, 기단갑석(基壇甲石)은 복련(伏蓮) 등에 보이는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ㆍ김치묘소(金緻墓所) : 율1리 ‘밤티’에 있는 김치의 묘소이다. 묘소 앞에는 현종 15년(1674)에 세운 묘갈이 있는데, 비문(碑文)은 아들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이 짓고 글씨는 손자사위 최선(崔渲)이 썼다. 안흥군(安興君) 남봉(南峰) 김치(金緻: 1577∼1625)는 본관이 안동(安東)이다. 자는 사정(士精)이고, 호는 남봉(南峯)ㆍ심곡(深谷)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광해군 때 대사간?병조참의를 지내다가 파직되었다. 인조반정 후에 대북(大北)으로 몰려 귀양을 갔다. 이후 김치는 동래부사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ㆍ김득신묘소(金得臣墓所) : 율1리 ‘밤티’에 있는 김득신의 묘소이다. 묘갈(墓碣)은 숙종 14년(1688)에 묘소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유재(游齎) 이현석이 짓고 글씨는 9촌 조카인 김봉지(金鳳至)가 썼다. 2004년 4월 30일에 증평군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안풍군(安豊君)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본관이 안동(安東)이다. 김치의 아들로, 자는 자공(子公)이고, 호는 백곡(栢谷)이다. 음보(蔭補)로 참봉을 지내고 문과에 급제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안풍군(安豊君)에 습봉(襲封)되었고, 시인으로 이름을 얻었다. ㆍ율리철화백자도요지(栗里鐵畵白磁陶窯址) : 증평읍 율1리 ‘솥점말’에서 율2리 ‘외봉’으로 이어지는 소로를 따라 약 600m 정도 올라가면 작은 다리가 있다. 여기서 소하천 서쪽의 경작지를 따라 약 100m 정도 올라가면 큰 밭에 도요지가 있다. 현재 도요지의 윤곽은 파악하기 힘드나, 불에 탄 흙과 도편들이 산재되어 있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도편(陶片)들은 철화백자편들로, 백색의 유조를 보이는 대접과 직경 4.5cm의 원을 긋고 그 안에 ‘복(福)’명을 새긴 도편 등이다. 철화백자편들은 바닥의 접지부기에서 모래받침 흔적이 남아 있고, 역삼각형굽이 많다. 조선 후기 도요지로 추정된다. Jeungpyeong-eup (koreanska: 증평읍) är en köping i kommunen Jeungpyeong-gun i provinsen Norra Chungcheong i den centrala delen av Sydkorea, 110 km sydost om huvudstaden Seoul. Det är den administrativa huvudorten i Jeungpyeong-gun. 자매 도시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충청남도 계룡시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양군 미국의 기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중국의 기 중국 장쑤성 롄윈강시 관난현 Indianapolis (/ˌɪndiəˈnæpəlɪs/),[9][10] colloquially known as Indy, is the state capital and most populous city of the U.S. state of Indiana and the seat of Marion County. According to the U.S. Census Bureau, the consolidated population of Indianapolis and Marion County was 977,203 in 2020.[11] The "balance" population, which excludes semi-autonomous municipalities in Marion County, was 887,642.[12] It is the 15th most populous city in the U.S., the third-most populous city in the Midwest, after Chicago and Columbus, Ohio, and the fourth-most populous state capital after Phoenix, Arizona, Austin, Texas, and Columbus. The Indianapolis metropolitan area is the 33rd most populous metropolitan statistical area in the U.S., with 2,111,040 residents.[13] Its combined statistical area ranks 28th, with a population of 2,431,361.[14] Indianapolis covers 368 square miles (950 km2), making it the 18th largest city by land area in the U.S. 인디애나폴리스(영어: Indianapolis, 문화어: 인디아나폴리스)는 미국 인디애나주의 중부에 있는 인디애나 주의 주도이자, 매리언군의 군청 소재지이다. 시카고 동남 약 300km에 있는 공업도시이다. 도시의 역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철도의 중심이 되면서부터 발전하였으며, 옥수수와 가축의 집산지로서 중요하다.[1] 인디애나 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으며, 미국 전체로는 12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피닉스를 이어 미국에서 인구가 2번째로 많은 주도이다. 미국 중서부에서는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주민 역사적 인구 인구조사 인구 %± 1840년 2,695 — 1850년 8,091 200.2% 1860년 18,611 130.0% 1870년 48,244 159.2% 1880년 75,056 55.6% 1890년 105,436 40.5% 1900년 169,164 60.4% 1910년 233,650 38.1% 1920년 314,194 34.5% 1930년 364,161 15.9% 1940년 386,972 6.3% 1950년 427,173 10.4% 1960년 476,258 11.5% 1970년 744,624 56.3% 1980년 700,807 −5.9% 1990년 731,327 4.4% 2000년 781,926 6.9% 2010년 820,445 4.9% 2019 (추산) 876,384 [2] 6.8% [3][4] 백인이 인구의 69%를 차지하며, 영국, 아일랜드,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계 등의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아시아인들과 히스패닉도 소수로 살고 있다. 경제 인디애나폴리스는 자동차와 비행기와 엔진, 전동 장치, 트럭 부품 등의 생산으로 공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또한 식품 제조업과 복사, 출판 등도 도시의 중요한 산업이다. 서비스업도 도시 경제의 가장 큰 산업이다. 교육 인디애나 대학교와 퍼듀 대학교의 공동 캠퍼스와 인디애나폴리스 대학교, 버틀러 대학교, 마틴 대학교 등의 대학들이 자리잡아, 인디애나 주의 교육의 중심지로 발달해왔다. 인디애나폴리스 공립 학교는 도시의 메트로폴리스에서 가장 큰 편이다. 스포츠 인디애나폴리스를 연고로 하는 프로스포츠팀은 NBA 농구의 인디애나 페이서스, NFL 풋볼의 인디애나폴리스 콜츠, WNBA 여자농구의 인디애나 피버가 있다. 역사 인디애나 주의회 의사당 1820년대 초반에 조지 포그와 존 매코믹의 가족들이 지금의 인디애나폴리스에 정착한 첫 백인들이었다. 이 도시가 인디애나 주의 주도로 승격될 당시에는 이 두 가족과 델라웨어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주도로 승격된 이유는 주의 중앙에 놓여있고, 행정관들이 화이트 강 근처는 탐험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다음에 그들이 큰 보트들을 띄우기 위해서는 강이 앝다는 걸 알게 되었다. 1836년에는 독일과 아일랜드 이민들이 도착하여 인디애나폴리스와 그 근처의 도시 브로드 리플 사이에 운하를 건설하였다. 운하는 재정적으로 실패하였으나, 1847년에는 첫 철도가 인디애나폴리스에 도달하였다. 1855년에는 8개의 철도가 도시에서 통하였다. 1800년대 중반에 인디애나폴리스는 농장 근처에 있는 공업 제품의 시장이 되었다. 1850년에는 도시의 인구가 8,091명으로, 1860년에는 18,611명으로, 1870년에는 48,244명으로 늘어났다. 1877년에는 가축 시장이 열렸고, 1880년대에는 주에서 천연 가스의 발견이 인디애나폴리스의 공업을 발달시키고, 싼 연료를 공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00년대에는 도시 인구가 169,164명으로 도달하였다. 1900년대 초반에는 자동차 공업이 인디애나폴리스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1909년에는 자동차 시험을 위하여 경주장을 지었다. 1920년에 자동차 공장들이 디트로이트로 옮겨지자, 1937년 이후에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자동차 생산이 없어졌다. 194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군사 차량을 만들기 위해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주하였다. 1950년에는 도시 인구가 427,173명으로 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도시에 많은 발전이 일어났다. 도시 재개발이 세워져 새로운 문화, 교육, 과학적 시설들이 설립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몇몇의 건설 프로젝트들이 다운타운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완료되었다. 인디애나 집회소가 1972년에, 호텔, 사무소와 쇼핑몰을 포함한 머천트 플라자가 1977년에 개장하였다. RCA 돔(1994년까지는 후지어 돔)이 1984년에 완공되었다. 전에 철도역이었던 유니언 역이 1986년에 시장으로 리모델되었다. 다운타운 안과 근처에 있는 새로운 아파트 단지들과 재건된 낡은 주택들이 많은 새 거주자들을 지역으로 끌어들였다. 1980년대에 인디애나폴리스는 아마추어 스포츠를 위한 국내 중심지가 되었다. 수영, 육상, 테니스, 체조, 사이클 경기와 축구를 위한 새로운 시설들이 건설되었다. 오늘날, 이 도시는 NCAA, 국내 대학 육상 협회와 국내 주립 고등 학교 연방을 포함한 아마추어 스포츠의 많은 기구들의 본부이다. 1990년대에는 몇몇의 다운타운 백화점들이 폐문하였다. 1990년대 중반에는 서클 센터몰의 개장과 함께 몇몇의 상점들이 다운타운 지역으로 돌아왔다. 문화 자동차 경주 대회인 인디애나폴리스 500이 개최되고 있어 미국 모터스포츠의 성지로 불린다. 스포츠 팀으로는 NFL 미식축구팀 인디애나폴리스 콜츠와 NBA 농구팀 인디애나 페이서스가 있다.

 증평읍(曾坪邑)


증평읍(曾坪邑)은 대한민국 충청북도 증평군의 서부를 흐르는 미호강의 지류 보강천 좌안에 위치한 증평군의 군청 소재지이다.

읍의 중심으로 보강천이 흐르며 미호평야가 이어진다. 부근의 음성 지방에서 나는 담배와 기타 농산물을 집산하는 시장으로 발전되었다. 최근에는 인삼이 주로 재배된다. 194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36번 국도가 지난다. 증평군의 명소로 수로가교(水路架橋)가 있는데, 이는 금강 상류 유역에 펼쳐진 평야의 젖줄기가 되고 있으며, 몽리면적이 500만 평에 달한다.

고구려 시대 : 금물노군에 속함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 흑양군 청연현이라 칭함

고려 태조 23년(940년) : 청당현이라 칭함

고려 현종 9년(1018년) : 청주목 청안현이라 칭함

조선 태종 5년(1405년) : 청안현에서 근서면, 남면으로 분리되어 속함

조선 고종 32년(1895년) : 청안군 근서면, 남면에 속함

1914년 4월 1일 :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청안군에서 괴산군에 속함, 괴산군 증평면이 됨

1949년 8월 13일 : 증평읍으로 승격

1990년 12월 31일 : 충청북도 증평출장소가 설치되어 증평읍, 도안면을 관할

2002년 4월 8일 :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안 발의

2003년 5월 29일 :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 공포

2003년 8월 30일 : 증평군 증평읍 개청

법정리 행정리

교동리 교동1리, 교동2리

남차리 남차1리, 남차2리, 남차3리

남하리 남하1리, 남하2리, 남하3리, 남하4리

내성리 내성1리, 내성2리

대동리 대동리

덕상리 덕상1리, 덕상2리, 덕상3리

미암리 미암1리, 미암2리, 미암3리, 미암4리, 미암5리

사곡리 사곡1리, 사곡2리, 사곡3리

송산리 송산1리, 송산2리, 송산3리, 송산4리, 송산5리, 송산6리, 송산7리

신동리 신동1리, 신동2리, 신동3리, 신동4리, 신동5리

연탄리 연탄1리, 연탄2리, 연탄3리, 연탄4리

용강리 용강1리, 용강2리, 용강3리, 용강4리, 용강5리

율리 율1리, 율2리

장동리 장동1리, 장동2리, 장동3리, 장동4리, 장동5리, 장동6리, 장동7리

죽리 죽리, 원평리

중동리 중동1리, 중동2리

증천리 증천1리, 증천2리, 증천3리, 증천4리, 증천5리

증평리 증평1리, 증평2리, 증평3리

창동리 창동1리, 창동2리, 창동3리, 창동4리, 창동5리, 창동6리

초중리 초중1리, 초중2리, 초중3리, 초중4리, 초중5리, 초중6리, 초중7리, 초중8리, 초중9리


사적

제527호 증평 추성산성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5호 증평 광덕사 석조여래입상

제141호 증평 남하리사지 삼층석탑

제197호 증평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군

제198호 증평 미암리 석조관음보살입상

제208호 증평 남하리 석조보살입상

충청북도 기념물

제98호 증평 배극렴 묘소

제122호 증평 연병호 생가

제132호 증평 신경행 묘소

제143호 증평 사곡리 우물

제160호 증평 김득신 묘소

제167호 증평 남하리 사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36호 증평 율리 석조관음보살입상

주요 시설

교육

한국교통대학교 증평캠퍼스

주거

아파트

송산리


지평건설 증평 송산 지평더웰 : 2014년 12월 입주.

1914년: 전국적인 행정구역의 폐합이 이루어질 때 청안군에 소속됐던 전체가 괴산군으로 합쳐지게 되자 청안군 남면의 26개리와 청안군 북면의 2개리, 청안군 읍내면의 회룡리, 청주군 산외2면의 초중리, 금대리의 일부와 월경, 청유 2개리를 병합하여 증천(曾川)과 장평(莊坪)의 두 이름에서 하나씩의 글자를 떼어 붙여 증평면이라 이름하여 괴산군 증평면이 됐다.

1949년 8월 13일: 증평면이 인구 증가로 증평읍으로 승격되었다.

1966년 1월 1일: 증평리에서 교동리·중동리·대동리를 나누어 법정리로 함에 따라 당초 11개리에서 3개리가 늘어나 14개리로 구성됐다.

1973년 7월 1일: 청원군 북이면 초중리를 증평읍에 편입하여 법정리가 15개리로 됐다.

1990년 12월 31일: 괴산군 증평읍, 도안면을 관할로 충청북도 증평출장소가 설치되었다.[2]

2002년 1월 2일: 증평리의 인구증가로 신동리·창동리·내성리·장동리·증천리를 법정리로 분리함에 따라 20개의 법정리를 관할하게 됐다.

2003년 8월 30일: 증평출장소가 증평군으로 승격하여 괴산군에서 분리되었다.[3] (1읍 1면)


증평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9)“장평”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裝坪”으로, 『朝鮮全道部窘面里洞名稱一覽』(1917)에는 “裝坪” 으로 나타난다.10) 증평군 내에 있는 지명을 조사하기 위해 마을별로 많은 분들의 협조를 받았다. 이 글은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뜻을 전한다. 11)『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보이는 “안합리”(安合理)는 『구한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안곡리(安谷里)”에 대한 오기(誤記)로 보인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의 기록에는 청안현 근서면에 29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증평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삼성리(三省里)ㆍ내동상리(內洞上里)ㆍ내동하리(內洞下里)ㆍ평사리(平沙里)ㆍ증자천리(曾子川里) 등 5개리이다. 그 뒤 증평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근서면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근서면은 26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내동상리와 내동하리는 내상리(內上里)로 합쳐졌으며, 증자천리는 증천리(曾川里)로 바뀌었고, 장평리(莊坪里)와 안곡리(安谷里)가 새로 생겼다.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증평리는 근서면의 장평리(壯坪里)ㆍ삼성리(三省里)ㆍ안합리(安合里)ㆍ내상리(內上里)ㆍ평사리(平沙里)ㆍ증천리(曾川里) 일부와 남면의 금반리(金盤里)ㆍ둔덕리(屯德里) 일부와 청주군(淸州郡) 산외이면(山外二面)의 초중리(楚中里)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증천리(曾川里)와 장평리(壯坪里)의 이름을 따서 증평리(曾坪里)라 하고, 괴산군(槐山郡) 증평면(曾坪面)에 편입하였다. 증평리는 당시 증평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1949년 8월 13일에 대통령령 제156호에 의하여 증평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괴산군 증평읍(曾坪邑) 증평리가 되었다. 증평리는 1966년 1월 1일에 교동리(校洞里)ㆍ중동리(中洞里)ㆍ대동리(大洞里)로 분리되었고, 다시 2002년 1월 2일에 창동리(昌洞里)ㆍ장동리(莊洞里)ㆍ증천리(曾川里)ㆍ내성리(內省里)ㆍ신동리(新洞里)로 분리되었다. 이때 대동(大洞) 5개리 중 2ㆍ3ㆍ4리를 증평리로 하였다.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증평리는 증천지소(曾川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증평리가 되었다.


[ 유래 ]


증평리(曾坪里)는 1914년에 증천리(曾川里)와 장평리(壯坪里)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증평리에는 증평초등학교ㆍ단군전ㆍ삼일공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2010년 5월 현재 794세대에 2,055명이 거주하고 있다. 증평리의 어원이 된 증천리(曾川里)와 장평리(莊坪里, 壯坪里)에 대해서는 해당 법정마을 설명을 참고하기 바란다.


증평1리(曾坪一里) : 증평1리는 증평리 중 서쪽에 있으며, 동진아파트와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증평2리(曾坪二里) : 증평2리는 증평리 중 동쪽에 있으며, 그린빌라ㆍ제일맨션ㆍ성호빌라ㆍ경일주택ㆍ대원빌라ㆍ미혁빌라와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모두 318세대이며, ‘삼일공원’이 있다.빨간산(-山) : 현재 ‘증평장로교회’ 부근에 있던 나지막한 언덕이다. ‘빨간산’은 ‘빨간’과 ‘산’으로 나뉘며, ‘빨갛게 보이는 산’을 뜻한다. 빨갛게 보이는 이유는 흙 색깔 때문일 수도 있고, 나무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곳은 ‘성호빌라’ 뒤편으로, 실제로 흙이 빨갛다.

증평3리(曾坪三里) : 증평3리는 증평리 중 남쪽에 있으며, 대동연립과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 문화재 ]


단군전(檀君殿) : 증평1리에 있는, 국조 단군을 모시는 사당(祠堂)이다. 단군전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과 경천숭조사상(敬天崇祖思想)을 길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건립되었다. 1929년에 일제는 이곳에 일본 신사(神祠)를 세웠으나, 1945년 8월 16일 광복 이튿날에 청년들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1948년 5월 27일에 김기석(金基錫: 1897~1978) 씨 등 증평 지역의 유지들이 그 자리에 단군전을 건립하였다. 단군전은 정면 3칸ㆍ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본전과 담장을 세워 건립되었다. 편액은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1924~1984)이 썼다. 단군의 영정은 가로 0.42mㆍ세로 0.82m의 크기로, 평정건(平頂巾)에 흰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제향과 관리를 위해 1953년에 ‘단군전봉찬회(檀君殿奉讚會)’를 설립해 해마다 10월 3일 개천절과 음력 3월 15일 어천절(御天節: 단군이 승천한 날)에 제향하고 있다. 단군기원은 단군조선을 개국한 왕검(王儉)의 즉위년을 기원으로 한 연호(年號)로, 현재 쓰고 있는 단기의 기원은 『동국통감(東國通鑑)』(성종 15년, 1484)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즉 중국 요(堯) 임금 25년(무진년, B.C. 2333) 10월 3일에 단군이 태백산[백두산]에서 단군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군전은 2004년 4월 30일에 증평군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교동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증평리는 1966년 1월 1일에 교동리(校洞里)ㆍ중동리(中洞里)ㆍ대동리(大洞里)로 분리되었고, 다시 2002년 1월 2일에 창동리(昌洞里)ㆍ장동리(莊洞里)ㆍ증천리(曾川里)ㆍ내성리(內省里)ㆍ신동리(新洞里)로 분리되었다. 이때 대동(大洞) 5개리 중 2ㆍ3ㆍ4리를 증평리로 하였다.이처럼 교동리는 1966년 1월 1일에 증평리에서 분리되어 법정리가 되었다.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충청북도증평출장소가 설치될 때에는 장평지소 관할이었다. 그러다가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교동리가 되었다.


[ 유래 ]


교동리라는 이름은 보통 조선시대 향교가 있었던 마을에 붙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 마을은 1966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곳으로, 이와는 거리가 멀다. 이곳에는 1930년 4월 19에 증평공립보통학교[지금의 증평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그로 인해 붙은 지명이다. 증평초등학교는 현재 증평리에 속해 있다. 교동리는 장동리ㆍ대동리ㆍ중동리ㆍ창동리에 들러 싸여 있다. 중동리와 함께 증평읍의 중심지다. 현재 교동리에는 괴산경찰서증평지구대ㆍ농협중앙회증평군지부ㆍKT증평지점ㆍ증평시외버스터미널 등이 들어서 있다. 2010년 5월 현재 420세대에 903명이 거주하고 있다.


교동1리(校洞一里) : 교동리 중 서북쪽에 있으며, 중앙연립과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물탕곳(-湯-)/물탱크(-tank) : 현재 증평소방서 옆에 있는 자리이다. ‘물탕곳’은 ‘물탕’과 ‘곳’으로 나뉜다. ‘물탕’은 ‘물을 채워 놓은 곳’이다. 따라서 ‘물탕’이나 ‘물탕곳’은 같은 뜻이다. 달리 ‘물탱크’로도 불리는데, 그 뜻은 ‘물탕’이나 ‘물탕곳’과 같다. 이곳은 예전에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이 있던 곳이다.

교동2리(校洞二里) : 교동리 중 동남쪽에 있으며, 주로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청안나들이(淸安-) : 현재 증평군청 앞 ‘사거리’에서 괴산군 청안면 방면으로 가는 증천리까지를 말한다. ‘청안나들이’는 ‘청안’과 ‘나들이’로, ‘나들이’는 다시 ‘나들’과 접미사 ‘이’로 나뉜다. ‘나들’은 ‘나고 들다’의 어간이니, ‘나들이’는 ‘특정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길목’이란 뜻이다. 따라서 ‘청안나들이’는 ‘괴산군 청안면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길목’으로 풀이된다.


중동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증평리는 1966년 1월 1일에 교동리(校洞里)ㆍ중동리(中洞里)ㆍ대동리(大洞里)로 분리되었고, 다시 2002년 1월 2일에 창동리(昌洞里)ㆍ장동리(莊洞里)ㆍ증천리(曾川里)ㆍ내성리(內省里)ㆍ신동리(新洞里)로 분리되었다. 이때 대동(大洞) 5개리 중 2ㆍ3ㆍ4리를 증평리로 하였다.이처럼 중동리는 1966년 1월 1일에 증평리에서 분리되어 법정리가 되었다.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충청북도증평출장소가 설치될 때에는 장평지소 관할이었다. 그러다가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중동리가 되었다.


[ 유래 ]


중동리는 교동리ㆍ창동리ㆍ대동리로 둘러싸인 마을로, 증평읍의 가운데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현 증평군청 자리에는 과거 증평역이 있어 그 주변은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또한 오래 전부터 5일장이 개설되고, ‘장뜰재래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도 증평새마을금고ㆍ증평신용협동조합ㆍ신한은행 증평지점ㆍ괴산축협 증평지소 등의 금융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증평역은 1980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2010년 5월 현재 285세대에 623명이 거주하고 있다.


중동1리(中洞一里) : 중동리 중 서쪽에 있으며,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중동2리(中洞二里) : 중동리 중 동쪽에 있으며, 선경아파트와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증평장이 서는 곳이다. 곡마당(曲馬堂) : 예전 ‘싸전마당’ 일대로, 곡마단(曲馬團)이 공연하던 곳이다. ‘곡마당’은 ‘곡마’와 ‘당’으로 나뉜다. ‘곡마(曲馬)’는 ‘길들여 놓은 말을 타고 재주를 부리거나 또는 그 재주’를 말하는데, 달리 ‘말놀음’이라고도 한다. ‘당’은 ‘마당’이다. 따라서 ‘곡마당’은 ‘곡마와 기술, 요술 따위를 보이는 마당’으로 풀이된다.나무전거리(-廛-) : 현재 ‘일신약국’ 주변이다. 과거 땔나무를 파는 가게가 많았다. ‘나무전거리’는 ‘나무전’과 ‘거리’로, ‘나무전’은 다시 ‘나무’와 ‘전’으로 나뉜다. ‘전’은 ‘물건을 벌여놓고 파는 가게’이다. 따라서 ‘나무전거리’는 ‘나무를 벌여놓고 파는 가게가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 네거리 : 예전 증평역[현재 증평군청] 앞 사거리 일대를 말한다. ‘네거리’는 ‘네 갈래로 나뉜 거리’를 뜻한다. 소전마당(-廛) : 예전 ‘싸전마당’ 부근으로, 우시장이 있었다. ‘소전마당’은 ‘소전’과 ‘마당’으로 나뉜다. 따라서 ‘소전마당’은 ‘소를 벌여놓고 파는 마당’으로 풀이된다.시장통(市場-) : 지금 5일장이 서는 ‘장뜰재래시장’ 구간을 말한다. ‘시장통’은 ‘시장’과 ‘통’으로 나뉜다. ‘통’은 ‘거리’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다. 따라서 ‘시장통’은 ‘시장거리’로 풀이된다. 싸전마당(-廛-) : ‘장뜰재래시장’ 내 야외광장 주변을 말한다. 예전 쌀가게가 많았고 넓은 마당이 있었다. ‘싸전마당’은 ‘싸전’과 ‘마당’으로 나뉘고, ‘싸전’은 ‘쌀전’에서 ‘ㄹ’이 탈락한 어형이다. 따라서 ‘싸전마당’은 ‘쌀을 벌려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는 마당’으로 풀이된다.어물전거리(魚物廛-) : 현재 ‘산초건강원’ 골목으로, 과거 어물가게가 있었다. 1940년대 말 일본인이 운영하던 ??영단방앗간??에 화재가 나서 1주일간 탔다. 당시는 소방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은 관계로 불을 낸 김 아무개 씨의 모친은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화재가 났던 자리에 어물전이 생겨났다. ??어물전거리??는 ??어물전??과 ??거리??로 나뉘고, ??어물전??은 다시??어물??과 ??전??으로 나뉜다. ??어물??은 ??생선이나 말린 생선을 벌려놓고 파는 가게 들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유기전거리(鍮器廛-) : 현재 ‘괴산축협증평지소’ 골목으로, 과거 놋그릇 가게가 있었다. ‘유기전거리’는 ‘유기전’과 ‘거리’로 나뉘고, ‘유기전’은 다시 ‘유기’와 ‘전’으로 나뉜다. ‘유기’는 ‘놋그릇’을 말한다. 따라서 ‘유기전거리’는 ‘놋그릇을 벌려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증평장(曾坪場) : 중동리에 5일마다 서는 전통적인 재래시장이다. 증평 5일장은 1일과 6일에 5일마다 서는 정기시장이다. 1923년 5월 1일에 조치원역∼증평역[당시 청안역, 지금의 증평군청 자리] 간 충북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인근 지역의 주요 농산물이 서울ㆍ부산 등 대도시로 운송됨에 따라 증평역 주변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5일장이 발달했다. 1928년 증평[청안] ~충주 간 충북선이 연장 개통됨으로 증평장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지금의 장소에 장이 서기 전인 1970년대 중반까지는 중동리 61번지[옛 ‘동일약국’ 자리]~중동리 112번지[‘반도천막’ 자리] 구간에 5일장이 열렸다. 2004년에 증평군에서는 재래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비 가림 시설을 설치하여 상인과 구매자에게 편리를 제공하고 있다. 채소전거리(菜蔬廛-) : 현재 ‘태평파크’ 옆 골목으로, 과거 채소가게가 있었다. ‘채소전거리’는 ‘채소전’과 ‘거리’로 나뉘고, ‘채소전’은 다시 ‘채소’와 ‘전’으로 나뉜다. 따라서 ‘채소전거리’는 ‘채소를 벌려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포목전거리(布木廛-) : 현재 ‘충북장’ 골목으로, 지금도 포목가게 일부가 남아 있다. ‘포목전거리’는 ‘포목전’과 ‘거리’로 나뉘고, ‘포목전’은 다시 ‘포목’과 ‘전’으로 나뉜다. ‘포목’은 ‘베와 무명’을 말한다. 따라서 ‘포목전거리’는 ‘베와 무명을 벌려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 피전거리(-廛-) : 현재 ‘화선집’이 있는 골목으로, 과거 고기를 팔았다. ‘피전거리’는 ‘피전’과 ‘거리’로 나뉘고, ‘피전’은 다시 ‘피’와 ‘전’으로 나뉜다. 여기서 ‘피’는 ‘고기와 선지’를 아울러 가리킨다. 따라서 ‘피전거리’는 ‘고기와 선지를 벌려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

[ 문화재 ]


대장장이 최용진 : 최용진 씨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고유 농기구와 생활도구 등을 제작하여 선조들의 농경문화를 널리 전수하고 있는 분이다. 최용진 씨는 현재 증평읍 중동 85-17번지 선경아파트 뒤편에서 10평 남짓의 ‘증평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다. 최 씨는 1995년 11월에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주관한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참가해 전국 최초로 야장부문(冶匠部門) 고유기능 전승자로 선정되었다. 또한 증평출장소 및 증평군향토문화연구소 등 관련 단체에서는 대장장이 최용진 씨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추진하였고, 2005년에 증평군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대동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증평리는 1966년 1월 1일에 교동리(校洞里)ㆍ중동리(中洞里)ㆍ대동리(大洞里)로 분리되었고, 다시 2002년 1월 2일에 창동리(昌洞里)ㆍ장동리(莊洞里)ㆍ증천리(曾川里)ㆍ내성리(內省里)ㆍ신동리(新洞里)로 분리되었다. 이때 대동(大洞) 5개리 중 2ㆍ3ㆍ4리를 증평리로 하였다.이처럼 대동리는 1966년 1월 1일에 증평리에서 분리되어 법정리가 되었다.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충청북도증평출장소가 설치될 때에는 장평지소 관할이었다. 2002년 1월 2일 행정구역 조정 시 대동1리만 대동리에 남고 대동2ㆍ3ㆍ4리는 증평리에 속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대동리가 되었다.


[ 유래 ]


대동리는 중동리ㆍ교동리ㆍ증평리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다. 대동리라는 이름은 증평리에서 분리될 때 가장 큰 마을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그 후 대동 2ㆍ3ㆍ4리는 증평리에 남고 대동1리만 법정리로 남게 되어 현재는 증평읍에서 가장 작은 마을이 되었다. 인구수도 율리를 제외하고는 가장 적다. 이 때문인지 주택지만 있을 뿐 관공서 등 특징적인 기관과 건물이 없다. 2010년 5월 현재 128세대에 280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동리 : 대동리는 단일 마을로,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용강리(龍江里)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근서면에 29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용강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외룡리(外龍里)ㆍ석현리(石峴里)ㆍ곡강리(曲江里)ㆍ청룡리(靑龍里)ㆍ내룡리(內龍里)ㆍ증자천리(曾子川里) 등 6개리가 있었다. 그 뒤 용강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근서면(近西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근서면은 26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증자천리(曾子川里)가 증천리(曾川里)로 변경되었으며, 청룡리(靑龍里)가 없어졌다.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용강리는 근서면 외룡리(外龍里)ㆍ석현리(石峴里)ㆍ곡강리(曲江里)ㆍ내룡리(內龍里)ㆍ증천리(曾川里) 일부와 남면(南面)의 작동(鵲洞)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용문리와 곡강리의 이름을 따서 용강리라 하고, 괴산군 증평면에 편입하였다.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용강리는 증천지소(曾川支所) 관할이었다. 2002년 1월 2일에 주민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지소의 관할구역을 변경할 때, 용강리는 증천지소에서 장평지소(莊坪支所)로 바뀌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용강리가 되었다.


[ 유래 ]


용강리는 1914년에 용문리와 곡강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용강리는 증평읍사무소에서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충주대증평캠퍼스[옛 청주과학대학]가 있고, 코스모텍ㆍ두산 등의 기업체가 들어와 있다. 2010년 5월 현재 434세대에 833명이 거주하고 있다.


용강1리(龍江一里) : ㆍ안용문이/내용문이(內龍門-)/내룡리(內龍里) : 용강1리와 용강3리는 통틀어 ‘용문(龍門)’ 또는 ‘용문이(龍門-)’로 불린다. 이는 지형이 ‘용이 드나드는 문’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용문’은 ‘청룡재’를 기준으로, ‘바깥용문이’와 ‘안용문이’로 나뉜다. 용강1리는 ‘청룡재’ 안쪽[북쪽]에 있어 ‘안용문이’ㆍ‘내용문이(內龍門-)’ㆍ‘내룡리(內龍里)’로 불린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내룡리(內龍里)’으로 불리던 곳이다. ‘안용문이’는 ‘웃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는데. ‘웃마을’은 마을의 은행나무가 있는 곳을 말하고 ‘아랫마을’은 사곡2리 ‘사청’ 쪽에 있는 곳을 말한다.소두방재/솥두방재 : ‘안용문이’ 뒤[동쪽]에 있는 산이다. ‘소두방재’ㆍ‘솥두방재’는 ‘소두방’ㆍ‘솥두방’과 ‘재’로 나뉜다. ‘소두방’ㆍ‘솥두방’은 모두 ‘솥뚜껑’을 뜻하는 ‘소댕’의 방언형으로, ‘소두방재’ㆍ‘솥두방재’는 ‘소댕 모양으로 생긴 고개’로 풀이된다.용강들(龍江-) : ‘안용문이’ 앞[서쪽]에 있는 들이다. ‘용강들’은 ‘용강’과 ‘들’로 나뉘며, ‘용강리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용강소류지(龍江小溜池) : ‘안용문이’ 서쪽에 있던 못으로, 1945년에 축조되었다. 경지정리로 인해 없어졌다. ‘용강소류지’는 ‘용강’과 ‘소류지’로 나뉘며, ‘용강리에 있는 못’으로 풀이된다.청룡재(靑龍-)/청룡재고개(靑龍-) : ‘청룡재’는 ‘청룡’과 ‘재’로 나뉜다. 지명에 나타나는 ‘청룡’은 주로 ‘주산(主山)에서 뻗어나간 왼쪽 산줄기’를 가리킨다. 풍수지리상으로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청룡재고개’는 ‘재’가 ‘고개’의 의미인 줄 모르고, 같은 뜻의 ‘고개’를 덧붙인, 일종의 유의중복 어형이다. 이 고개를 경계로 안쪽[북쪽]을 ‘안용문이’로, 바깥쪽[남쪽]을 ‘바깥용문이’로 부른다. 현재는 포장농로가 되었다. 함석산[-石山] : ‘안용문이’ 동쪽에 있는 산으로, 암용의 머리에 해당되는 곳이다. 과거 샘이 있었고 돌이 많다. ‘함석산’은 ‘한석산’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한석산’은 ‘한’과 ‘석산’으로, ‘석산’은 다시 ‘석’과 ‘산’으로 나뉜다. 따라서 ‘한석산’이나 변화형 ‘함석산’은 ‘큰 돌산’으로 풀이된다.

용강2리(龍江二里) : ㆍ곡강(曲江)/곡강골(曲江-) : ‘돌고개’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증평에서 괴산군 청안면 방면의 592번지방도 오른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곡강(曲江)’으로 불리던 곳이다. ‘곡강’이나 ‘곡강골’은 마을 형태가 굽이쳐 흐르는 강[河回]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전설에 따르면, 용강리에는 암용과 수용이 있었는데 암용은 ‘안용문이’에 수용은 ‘바깥용문이’에 살았다. 용강리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이곳에 살던 용이 승천할 때 꼬리를 쳐서 강이 구부러졌다고 한다. 김득신(金得臣)은 ‘차운(次韻)’이란 제목으로 ‘곡강’을 노래하고 있다.

용강3리(龍江三里) :ㆍ바깥용문이/외용문이(外龍門-)/외룡리(外龍里) : ‘용문’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다. ‘용문’은 ‘청룡재’를 기준으로 ‘바깥용문이’와 ‘안용문이’로 나뉜다. 용강3리는 ‘청룡재’ 바깥쪽[남쪽]에 있어 ‘바깥용문이’ㆍ‘외용문이(外龍門-)’ㆍ‘외룡리(外龍里)’로 불린다. 수용이 살던 곳이라 전한다. ‘(주)유니더스’가 수용의 머리가 있는 곳이고, ‘(주)코스모텍’ 자리가 용의 꼬리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호구총수』(정조 13년, 1789)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외룡리(外龍里)’로 불리던 곳이다.빨각산(-山) : ‘바깥용문이’ 동쪽, ‘절골’ 안에 있는 산이다. ‘(주)유니더스’ 근처이다. ‘빨각산’는 ‘빨간산’의 변화형이다. ‘빨간산’은 ‘흙이 빨간 산’으로 풀이된다. 이 산은 실제로 빨간 흙으로 되어 있다.상종말[山旌-] : ‘바깥용문이’ 입구, ‘곡산연씨열녀각’이 있는 곳을 말한다. ‘상종말’은 ‘상정말’의 변화형으로 보인다. ‘상정말’은 다시 ‘산정말’에 기원을 둔다. ‘산정말’은 ‘산정’과 ‘말’로 나뉜다. ‘산정’은 몇 가지로 풀이된다. 하나는 ‘산정(山亭)’으로, 다른 하나는 ‘산정(山井)’으로, 마지막 하나는 ‘산정(山旌)’으로 볼 수 있다. 본 예는 열녀각이 있는 곳이니, 마지막으로 보아 ‘산 정려문이 있는 마을’로 풀이된다. 옻샘 : ‘절골’ 안에 있던 샘이다. ‘옻샘’은 ‘옻’과 ‘샘’으로 나뉜다. ‘옻’은 ‘옻나뭇과 식물 속에 있는 우루시올(urushiol)에 의한 접촉성 피부염’으로, 빨갛게 붓거나 물집이 생기거나 하여 매우 가렵다. 옻이 오르면 찬물로 닦는 것이 효과적이다. 찬물이 피부염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옻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는 찬물 샘을 ‘옻샘’으로 불렀던 것이다. 과거 물이 차고 좋아 피부병에 특별한 효험이 있었다. 농로가 나면서 사라졌다.장등 : ‘바깥용문이’ 동쪽에 있던 마을의 높은 언덕이다. 예전에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으나, 현재는 도로가 나 있다. ‘장등’은 ‘산마루’의 방언형이다.절골 : ‘바깥용문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괴산군 청안면 금신리 ‘회룡’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텃논들’ 동쪽에 붙어 있다. ‘절골’은 ‘절’과 ‘골’로 나뉘며, ‘절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텃논들 : ‘바깥용문이’ 동쪽에 있는 들이다. ‘텃논들’은 ‘텃논’과 ‘들’로 나뉜다. ‘텃논’은 ‘집터에 딸리거나 마을 가까이에 있는 논’을 뜻하니, ‘텃논들’은 ‘집터에 딸리거나 마을 가까이에 있는 논으로 되어 있는 들’로 풀이된다.

용강4리(龍江四里) : ㆍ돌고개1/석현(石峴) : 마을 서쪽에 있는 ‘돌고개2’[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달리 ‘석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돌고개’에 대한 한자 이름이다. 『호구총수』(정조 13년, 1789년)에는 보이지 않으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석현(石峴)’으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石峴里/돌고?’로 기록되어 있다. 광산앞들(鑛山-) : ‘돌고개1’[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광산앞들’은 ‘광산’과 ‘앞들’로 나뉘며, ‘광산 앞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예전에 ‘돌고개2’[고개]에 금광이 있었고, 그 앞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돌고개2/금정간[金店間] : ‘돌고개1’[마을] 서쪽에 있는 고개이다. ‘돌고개2’[고개]는 ‘돌’과 ‘고개’로 나뉘며, ‘돌이 많은 고개’로 풀이된다. 이 고개로 인하여 마을 이름도 ‘돌고개1’[마을]이 되었다. 달리 ‘금정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금점간’의 연구개음화 어형이다. 최초의 어형 ‘금점간’은 ‘금점’과 ‘간’으로 나뉜다, ‘금점(金店)’은 ‘금광(金鑛)’과 같은 뜻이고, ‘간(間)’은 ‘대장간’ㆍ‘외양간’ㆍ‘푸줏간’ 등과 같이, 몇몇 명사 뒤에 붙어 ‘장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다. 따라서 ‘금정간’은 ‘금광이 있는 장소’로 풀이된다. 실제 이곳에서는 예전에 금을 캤다. 돌깨너머 : ‘돌고개1’[마을] 동쪽에 있는 고개로, 괴산군 청안면 금신리로 갈 때 넘었다. 고개에 돌이 많아 지게 길을 내느라고 돌을 깨며 넘어 다녔다는 말이 전한다. 그러나 ‘돌깨너머’는 ‘돌고개너머’의 변화형이다. ‘돌고개너머’는 ‘돌고개’와 ‘너머’로 나뉘며, ‘돌고개2[고개] 너머의 장소’로 풀이된다. 현재는 2차선 포장도로가 되었다.모종골[慕亭-] : ‘안까치골’ 북쪽에서 ‘안까치골’과 이어지는 골짜기이다. ‘모종골’은 ‘모정골’의 변화형이다. ‘모정골’은 ‘모정’과 ‘골’로 나뉘며, ‘모정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모정(慕亭)’은 ‘짚이나 새 따위로 지붕을 이은 정자’를 뜻한다. 농사를 짓는 경작지에서 쉼터 역할을 하는 곳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전에 모정이 있어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샘너머골 : ‘돌고개2’[고개]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샘너머골’은 ‘샘너머’와 ‘골’로 나뉘며, ‘샘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성내골(城內-)/성니골[城內-]/성리골[城內-] : ‘돌고개1’[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청안면으로 가는 길목이다. ‘성내골’은 ‘성내’와 ‘골’로, ‘성내’는 다시 ‘성’과 ‘내’로 나뉜다. ‘성’은 ‘성(城)’이고, ‘내’는 ‘안[內]’의 뜻이니, ‘성내골’은 ‘성 안쪽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골짜기가 마치 성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아늑해서 붙은 이름이다. ‘성니골’과 ‘성리골’은 모두 ‘성내골’의 변화형으로, 그 뜻은 같다.성리고개[城內-] : ‘성내골’에 있는 고개로, 청안면 금신1리(錦新一里)와 경계를 이룬다. 현재는 1차선 포장도로이나, 4차선 확장공사가 진행 중이다. ‘성리고개’는 ‘성리’와 ‘고개’로 나뉘며, ‘성리’는 ‘성내’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성리고개’는 ‘성내골에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여수박골 : ‘돌고개1’[마을] 북쪽, 충주대증평캠퍼스 기숙사 쪽으로 있는 골짜기이다. ‘여수박골’는 ‘여수박’과 ‘골’로 나뉘고, ‘여수박’은 다시 ‘여수’와 ‘박’으로 나뉜다. ‘여수’는 ‘여우[狐]’에 대한, ‘박’은 ‘바위’에 대한 방언형이다. ‘여수박’은 지역에 따라 ‘여우바위’ㆍ‘여시바위’ㆍ‘여수배’ 등으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에는 여우 모양을 닮았다거나 여우가 살았다는 유래담이 붙어 있다. 따라서 ‘여수박골’은 ‘여우 모양을 닮은 바위가 있거나 여우가 살았던 바위가 있는 골짜기’이다.코단고개 : ‘돌고개1’[마을] 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돌고개1’[마을]에서 괴산군 청안면 금신3리 ‘새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경사가 급해 지게를 짊어지고 가다보면 허리가 구부러지면서 코가 고개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는 근거 없는 설명이다. ‘코단고개’는 ‘곶안고개’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곶안고개’는 ‘곶안’과 ‘고개’로, ‘곶안’은 다시 ‘곶’과 ‘안’으로 나뉜다. ‘곶’은 원래 ‘바다나 호수로 뾰족하게 내민 땅[串ㆍ岬]’을 뜻한다. 그러나 이 ‘곶’이 지명에 사용될 경우, 원래 의미와의 관련 아래 ‘들판 쪽으로 산등성이가 쭉 뻗어 나온 곳’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곶안고개’나 변화형 ‘코단고개’는 ‘들판 쪽으로 산등성이가 쭉 뻗어 나온 곳 안쪽에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이 고개에는 서낭당도 있었으나, 현재는 이용되지 않는다. ‘곶’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용강2리 ‘꽃산구링이’를 참고하기 바란다.

용강5리(龍江五里) : ‘돌고개1’[마을] 서쪽, 충주대증평캠퍼스 후문 쪽에 있는 서호아파트단지이다.

[ 문화재 ]


곡산연씨열녀각(谷山延氏烈女閣) : 용강3리 331번지에 있는 열녀각이다. 열녀각은 이 지역에 거주하던 장환일(張煥一: 옥구장씨)의 처 곡산연씨(谷山延氏)의 정려이다. 남편이 위독하자 연 씨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5일간이나 연명시켰으나, 남편은 끝내 세상을 떴다. 그러자 연 씨 또한 약을 먹고 남편을 따라 숨을 거뒀다. 고종 29년(1892)에 영인(令人)에 증직되고, 정려가 명해 졌다. 건물은 정면 1칸ㆍ측면 1칸의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열녀각의 안에는 ‘증조봉대부동몽교관장환일처영인곡산연씨열녀지문(贈朝奉大夫童蒙敎官張煥一妻令人谷山延氏烈女之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비지정문화재이다.ㆍ장용기부부정효각(張龍基夫婦旌孝閣) : 용강3리 547-1에 있는 정효각이다. 정효각은 효자 장용기와 그의 처 능성구씨(綾城具氏)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이 부부는 어머니가 병이 들자 극진히 간호했고,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와 같은 효행을 기리고자 1926년에 유림과 문중에서 정효각을 세웠다. 사당의 건물 구조는 정면 1칸ㆍ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사당 안에는 ‘효자효부학생장공용기처유인능성구씨정효문(孝子孝婦學生長公龍基妻孺人綾城具氏旌孝門)’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비지정문화재이다.


율리(栗里)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남면(南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남면에 27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율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삼기리(三岐里)ㆍ율치리(栗峙里)ㆍ봉천리(奉天里) 등 3개리가 있었다. 그 뒤 율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남면(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남면은 25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봉천리(奉天里)가 외봉천리(外奉天里)와 내봉천리(內奉天里)로 나뉘었다.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율리는 남면 삼기리(三岐里)ㆍ율치리(栗峙里)ㆍ외봉천리(外奉天里)ㆍ내봉천리(內奉天里)와 청주군 산외이면(山外二面)의 청유리(淸油里)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율치리와 삼기리의 이름을 따서 율리라 하고, 괴산군 증평면에 편입하였다.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율리는 증천지소(曾川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율리가 되었다.


[ 유래 ]


율리는 1914년에 율치리와 삼기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율리는 증평읍의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최근 휴양촌과 산악자전거 코스가 조성되는 등 증평군의 대표적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2010년 5월 현재 112세대에 197명이 거주하고 있다.


율1리(栗一里) :ㆍ밤티/밤티골/율치((栗峙) : ‘밤고개2’[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밤티’나 ‘밤티골’은 모두 ‘밤고개’ 아래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율치’는 ‘밤티’를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율치리(栗峙里)’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栗峙/밤티’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80여 전에 김치(金緻, 임진왜란 때 순국한 진주목사 김시민의 양아들,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이룬 마을이다. 마을 뒤편에는 김치와 그의 아들 김득신, 손자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율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최근에는 휴양촌이 조성되어 있어 각종 연수와 행사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득신(金得臣)은 ‘율협도중(栗峽道中)’과 ‘율협(栗峽)’이란 제목으로 ‘밤티골’을 노래하고 있다.

율2리(栗二里) : ㆍ봉천리(奉天里) : ‘밤티’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 ‘봉천리(奉天里)’로 기록되어 있고,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내봉천(內奉天)’과 ‘외봉천(外奉天)’으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고유지명 없이 ‘內奉天’과 ‘外奉天’으로 기록되어 있다. 봉천리는 하음봉씨(河陰奉氏)들이 처음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기 시작해서 붙인 이름이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端宗)을 폐위시킨 세조 2년(1456)에, 성삼문?방팽년?유응부 등 사육신들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 이들이 거사에 실패하자 사옹원별좌(司饔院別座) 봉여해(奉汝諧)는 세조를 살해하기 위해 칼을 차고 어전(御殿)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도중에 의금부(義禁府)에 발각되어 죽게 되었다. 이후 봉여해의 친족들은 참화(慘禍)를 면하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 중 일부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봉 씨들이 앞산에 올라 고향인 강화도(江華島)를 쳐다보며 향수를 달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양에서 봉 씨들의 일족을 멸살하기 위해 찾아오는 관리들을 감시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봉천리는 ‘바깥봉천이[外奉天]’와 ‘안봉천이[內奉天]’로 나뉜다. 전자는 봉천리 중 바깥쪽에 있는 마을로, ‘머릿돌은혜원’이 있는 곳이다. 후자는 봉천리 중 안쪽에 있는 마을로, 괴산군 청안면 ‘질마재’로 넘어가는 곳에 있다. 구석산(-山) : ‘바깥봉천이’ 북서쪽에 있는 산으로, 높이 460.8m이다. 괴산군 청안면 문방리(文芳里)와 경계를 이룬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청안현(淸安縣) 불우조(佛宇條)에는 “구석사재좌구산세전건읍초기리산지고취수족지신자이명구석유조회기(龜石寺在座龜山世傳建邑初忌離山之鼓取水族之腎者而名龜石有曹繪記)” 즉 “구석사는 좌구산에 있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이 고을을 세웠을 때 남쪽 산이 높은 것을 꺼려 이 절을 세우고 수족(水族)의 신인 거북의 이름을 따서 구석이라 했다는 조회(曺繪)의 기록이 있다.”라는 뜻이다. 이 기록대로라면 구석산은 ‘구석사’와 관련되며, ‘거북 모양의 돌이 있는 산’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구석산’은 ‘구석’과 ‘산’으로 나뉘며, ‘구석에 있는 산’으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망나지골 : ‘안봉천이’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망나지골’은 ‘망나지’와 ‘골’로 나뉜다. 여기서 ‘망나지’의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 ‘망나니’와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망나니’는 ‘노래기’를 뜻하니, ‘망나지골’은 ‘노래기가 많은 골짜기’로 풀이된다.망월장등(望月-) : ‘안봉천이’ 뒤[북쪽]에 있는 산마루이다. ‘망월장등’은 ‘망월’과 ‘장등’으로 나뉘며, ‘달을 바라보는 산마루’로 풀이된다. ‘장등’은 ‘산마루’의 충청도방언형이다. 물치폭포(-瀑布) : ‘바깥봉천이’와 ‘안봉천이’ 사이에 있는 폭포이다. ‘물치폭포’는 물치와 폭포로 나뉜다. 여기서 ‘물치’는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 지역에 따라서는 ‘물이 내리치는’ 뜻과 관련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밤나무단지(-團地) : ‘안봉천이’ 남서쪽에 있다. ‘밤나무단지’는 ‘밤나무’와 ‘단지’로 나뉘며, ‘밤나무가 집단적으로 자라고 있는 곳’으로 풀이된다. 이곳은 예전에 밤나무가 많았지만, 지금은 벌목을 해서 그리 많지 않다. 봉천골(奉天-) : ‘밤티’에서 ‘바깥봉천이’로 가는 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봉천골’은 ‘봉천’과 ‘골’로 나뉘며, ‘봉천리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안골 : ‘바깥봉천이’에서 구석산 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안골’은 ‘안’과 ‘골’로 나뉘며, ‘안쪽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일라지골 : ‘안봉천이’ 동남쪽, ‘망나지골’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충남 공주시 의당면 덕학리 ‘일라동’[마을]은 달리 ‘이라울’로도 불린다. 그러나 ‘일라동’이나 ‘이라울’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본 예도 ‘일라지’와 ‘골’로 나뉘나, ‘일라지’의 뜻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할미당(-堂) : ‘물치폭포’ 위쪽, 산 정상에 있던 제단이다. ‘할미당’은 ‘서낭당’을 말한다. ‘서낭당’은 ‘서낭에게 제사하기 위한 제단’으로, 지방에 따라 성황당(城隍堂)ㆍ할미당(-堂: 전남)ㆍ천황당’(天隍堂: 경북)ㆍ국사당(國師堂: 평안)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과거 이곳에는 서낭에게 제사하는 제단이 있었다. ‘서낭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초중2리 ‘서낭골’을 참고하기 바란다.

[ 문화재 ]


율리석조관음보살입상(栗里石造觀音菩薩立像) : 증평 시가지에서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 방면으로 503번지방도를 따라 가면 증평읍 율1리에 이른다. 이 불상은 율1리 앞의 들판에 있던 석조물인데, 1979년에 율리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수몰되자 지금의 위치인 저수지 서편 언덕으로 옮겨졌다. 당시 보살입상(菩薩立像) 밑에서 지석(誌石)이 출토되었는데, “대시주 서정민 서경술 석수 박노적 박성립 화주 한두성 숭정후 갑신년 10월 일 입(大施主徐丁民徐京戌石手朴老赤朴成立化主韓斗星崇禎後甲申年十月日立)”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이로 보아 보살입상은 숙종 30년(1704)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다듬어진 보살입상은 높이 2.10m로, 불신(佛身)은 육중하며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상호는 마멸이 심해 원형을 알 수 없고, 귀는 어깨에 닿았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위로 들어 가슴에 얹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이고, 왼손은 아래로 늘어뜨린 여원인(與願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활모양의 주름을 하고 있는데, 허리에 띠를 두른 듯하다. 2002년 3월15일에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이 보살입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마을의 한 노인이 미륵을 정성껏 모시다가 그만 귀찮아서 더 이상 모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노인의 머리에 부스럼이 많이 났다. 노인은 백방으로 처방해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에 미륵에게 다시 빌었더니 씻은 듯이 나았다. 또 미륵 옆에서 논일을 하던 농부가 새참을 먹고 있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논두렁이 무너져 내렸다. 이에 미륵에게 약간의 공양을 하였더니 더 이상 논두렁이 무너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농부는 무엇을 먹더라도 미륵에게 공양을 했다. 또 아들이 없어 고민하던 부녀자가 미륵에게 치성을 드리고 한 번에 삼형제를 출산했다. 미륵의 영험으로 간주해 “아들 하나만 데려가라.”며 기도를 올렸더니, 이번에는 삼형제를 한꺼번에 데리고 갔다. ㆍ율리3층석탑(栗里三層石塔) : 증평읍 송산리 253에 있다. 증평 시가지에서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 방면으로 503번지방도를 따라 가면 증평읍 율1리에 이른다. 여기서 동북쪽 계곡을 따라 약 2km 쯤 들어서면 구석산(龜石山)의 구석사(龜石寺) 터에 이른다. 이 터에 3층 석탑의 탑재가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민속체험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청안현(淸安縣) 불우조(佛宇條)에는 “구석사재좌구산세전건읍초기리산지고취수족지신자이명구석유조회기(龜石寺在座龜山世傳建邑初忌離山之鼓取水族之腎者而名龜石有曹繪記)” 즉 “구석사는 좌구산에 있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이 고을을 세웠을 때 남쪽 산이 높은 것을 꺼려 이 절을 세우고 수족(水族)의 신인 거북의 이름을 따서 구석이라 했다는 조회(曺繪)의 기록이 있다.”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는 사지(寺址)와 탑(塔)을 언급해, “구석산 국유림의 율리에 있으며, 전(田)으로 변해서 반 헐어서 깨진 석탑이 있다.”고 했다. 이 탑은 복원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높이는 1.6m이다. 기단(基壇)의 갑석(甲石)과 1층 탑신(塔身), 옥개석(屋蓋石), 2?3층 옥개석(屋蓋石)이 남아 있을 뿐이며 상륜부(上輪部)는 결실되었다. 기단갑석(基壇甲石)은 복련(伏蓮)의 연판(蓮瓣)을 조각하고 고임을 마련했으며, 너비 68cm?높이 16cm이다. 1층 탑신(塔身)은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으며 너비 40.5cm?높이 20.5cm이고, 옥개석(屋蓋石)은 3단 받침에 고임을 마련했으며 너비 80cm?높이 30.2cm이다. 2층 옥개석은 3단의 받침에 고임을 마련했으며 너비 67cm?높이 28.3cm이다. 3층 옥개석은 3단의 받침에 고임을 마련했으며 너비 51cm?높이 17cm이다. 이 탑은 옥개석(屋蓋石)의 전각(轉角)이 파손됐으나, 기단갑석(基壇甲石)은 복련(伏蓮) 등에 보이는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ㆍ김치묘소(金緻墓所) : 율1리 ‘밤티’에 있는 김치의 묘소이다. 묘소 앞에는 현종 15년(1674)에 세운 묘갈이 있는데, 비문(碑文)은 아들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이 짓고 글씨는 손자사위 최선(崔渲)이 썼다. 안흥군(安興君) 남봉(南峰) 김치(金緻: 1577∼1625)는 본관이 안동(安東)이다. 자는 사정(士精)이고, 호는 남봉(南峯)ㆍ심곡(深谷)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광해군 때 대사간?병조참의를 지내다가 파직되었다. 인조반정 후에 대북(大北)으로 몰려 귀양을 갔다. 이후 김치는 동래부사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ㆍ김득신묘소(金得臣墓所) : 율1리 ‘밤티’에 있는 김득신의 묘소이다. 묘갈(墓碣)은 숙종 14년(1688)에 묘소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유재(游齎) 이현석이 짓고 글씨는 9촌 조카인 김봉지(金鳳至)가 썼다. 2004년 4월 30일에 증평군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안풍군(安豊君)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본관이 안동(安東)이다. 김치의 아들로, 자는 자공(子公)이고, 호는 백곡(栢谷)이다. 음보(蔭補)로 참봉을 지내고 문과에 급제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안풍군(安豊君)에 습봉(襲封)되었고, 시인으로 이름을 얻었다. ㆍ율리철화백자도요지(栗里鐵畵白磁陶窯址) : 증평읍 율1리 ‘솥점말’에서 율2리 ‘외봉’으로 이어지는 소로를 따라 약 600m 정도 올라가면 작은 다리가 있다. 여기서 소하천 서쪽의 경작지를 따라 약 100m 정도 올라가면 큰 밭에 도요지가 있다. 현재 도요지의 윤곽은 파악하기 힘드나, 불에 탄 흙과 도편들이 산재되어 있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도편(陶片)들은 철화백자편들로, 백색의 유조를 보이는 대접과 직경 4.5cm의 원을 긋고 그 안에 ‘복(福)’명을 새긴 도편 등이다. 철화백자편들은 바닥의 접지부기에서 모래받침 흔적이 남아 있고, 역삼각형굽이 많다. 조선 후기 도요지로 추정된다.

Jeungpyeong-eup (koreanska: 증평읍) är en köping i kommunen Jeungpyeong-gun i provinsen Norra Chungcheong i den centrala delen av Sydkorea, 110 km sydost om huvudstaden Seoul. Det är den administrativa huvudorten i Jeungpyeong-gun.

자매 도시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충청남도 계룡시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양군

미국의 기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중국의 기 중국 장쑤성 롄윈강시 관난현

Indianapolis (/ˌɪndiəˈnæpəlɪs/),[9][10] colloquially known as Indy, is the state capital and most populous city of the U.S. state of Indiana and the seat of Marion County. According to the U.S. Census Bureau, the consolidated population of Indianapolis and Marion County was 977,203 in 2020.[11] The "balance" population, which excludes semi-autonomous municipalities in Marion County, was 887,642.[12] It is the 15th most populous city in the U.S., the third-most populous city in the Midwest, after Chicago and Columbus, Ohio, and the fourth-most populous state capital after Phoenix, Arizona, Austin, Texas, and Columbus. The Indianapolis metropolitan area is the 33rd most populous metropolitan statistical area in the U.S., with 2,111,040 residents.[13] Its combined statistical area ranks 28th, with a population of 2,431,361.[14] Indianapolis covers 368 square miles (950 km2), making it the 18th largest city by land area in the U.S.

인디애나폴리스(영어: Indianapolis, 문화어: 인디아나폴리스)는 미국 인디애나주의 중부에 있는 인디애나 주의 주도이자, 매리언군의 군청 소재지이다. 시카고 동남 약 300km에 있는 공업도시이다. 도시의 역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철도의 중심이 되면서부터 발전하였으며, 옥수수와 가축의 집산지로서 중요하다.[1] 인디애나 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으며, 미국 전체로는 12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피닉스를 이어 미국에서 인구가 2번째로 많은 주도이다. 미국 중서부에서는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주민

역사적 인구

인구조사 인구

1840년 2,695

1850년 8,091 200.2%

1860년 18,611 130.0%

1870년 48,244 159.2%

1880년 75,056 55.6%

1890년 105,436 40.5%

1900년 169,164 60.4%

1910년 233,650 38.1%

1920년 314,194 34.5%

1930년 364,161 15.9%

1940년 386,972 6.3%

1950년 427,173 10.4%

1960년 476,258 11.5%

1970년 744,624 56.3%

1980년 700,807 −5.9%

1990년 731,327 4.4%

2000년 781,926 6.9%

2010년 820,445 4.9%

2019 (추산) 876,384 [2] 6.8%

[3][4]

백인이 인구의 69%를 차지하며, 영국, 아일랜드,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계 등의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아시아인들과 히스패닉도 소수로 살고 있다.


경제

인디애나폴리스는 자동차와 비행기와 엔진, 전동 장치, 트럭 부품 등의 생산으로 공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또한 식품 제조업과 복사, 출판 등도 도시의 중요한 산업이다. 서비스업도 도시 경제의 가장 큰 산업이다.


교육

인디애나 대학교와 퍼듀 대학교의 공동 캠퍼스와 인디애나폴리스 대학교, 버틀러 대학교, 마틴 대학교 등의 대학들이 자리잡아, 인디애나 주의 교육의 중심지로 발달해왔다. 인디애나폴리스 공립 학교는 도시의 메트로폴리스에서 가장 큰 편이다.


스포츠

인디애나폴리스를 연고로 하는 프로스포츠팀은 NBA 농구의 인디애나 페이서스, NFL 풋볼의 인디애나폴리스 콜츠, WNBA 여자농구의 인디애나 피버가 있다.


역사


인디애나 주의회 의사당

1820년대 초반에 조지 포그와 존 매코믹의 가족들이 지금의 인디애나폴리스에 정착한 첫 백인들이었다. 이 도시가 인디애나 주의 주도로 승격될 당시에는 이 두 가족과 델라웨어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주도로 승격된 이유는 주의 중앙에 놓여있고, 행정관들이 화이트 강 근처는 탐험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다음에 그들이 큰 보트들을 띄우기 위해서는 강이 앝다는 걸 알게 되었다.


1836년에는 독일과 아일랜드 이민들이 도착하여 인디애나폴리스와 그 근처의 도시 브로드 리플 사이에 운하를 건설하였다. 운하는 재정적으로 실패하였으나, 1847년에는 첫 철도가 인디애나폴리스에 도달하였다. 1855년에는 8개의 철도가 도시에서 통하였다. 1800년대 중반에 인디애나폴리스는 농장 근처에 있는 공업 제품의 시장이 되었다. 1850년에는 도시의 인구가 8,091명으로, 1860년에는 18,611명으로, 1870년에는 48,244명으로 늘어났다.


1877년에는 가축 시장이 열렸고, 1880년대에는 주에서 천연 가스의 발견이 인디애나폴리스의 공업을 발달시키고, 싼 연료를 공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00년대에는 도시 인구가 169,164명으로 도달하였다.


1900년대 초반에는 자동차 공업이 인디애나폴리스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1909년에는 자동차 시험을 위하여 경주장을 지었다. 1920년에 자동차 공장들이 디트로이트로 옮겨지자, 1937년 이후에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자동차 생산이 없어졌다. 194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군사 차량을 만들기 위해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주하였다. 1950년에는 도시 인구가 427,173명으로 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도시에 많은 발전이 일어났다. 도시 재개발이 세워져 새로운 문화, 교육, 과학적 시설들이 설립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몇몇의 건설 프로젝트들이 다운타운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완료되었다. 인디애나 집회소가 1972년에, 호텔, 사무소와 쇼핑몰을 포함한 머천트 플라자가 1977년에 개장하였다. RCA 돔(1994년까지는 후지어 돔)이 1984년에 완공되었다. 전에 철도역이었던 유니언 역이 1986년에 시장으로 리모델되었다. 다운타운 안과 근처에 있는 새로운 아파트 단지들과 재건된 낡은 주택들이 많은 새 거주자들을 지역으로 끌어들였다.


1980년대에 인디애나폴리스는 아마추어 스포츠를 위한 국내 중심지가 되었다. 수영, 육상, 테니스, 체조, 사이클 경기와 축구를 위한 새로운 시설들이 건설되었다. 오늘날, 이 도시는 NCAA, 국내 대학 육상 협회와 국내 주립 고등 학교 연방을 포함한 아마추어 스포츠의 많은 기구들의 본부이다.


1990년대에는 몇몇의 다운타운 백화점들이 폐문하였다. 1990년대 중반에는 서클 센터몰의 개장과 함께 몇몇의 상점들이 다운타운 지역으로 돌아왔다.


문화

자동차 경주 대회인 인디애나폴리스 500이 개최되고 있어 미국 모터스포츠의 성지로 불린다. 스포츠 팀으로는 NFL 미식축구팀 인디애나폴리스 콜츠와 NBA 농구팀 인디애나 페이서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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